추가학습자료 _영상문화콘텐츠이해_중간고사_2 (1) PDF

Summary

이 자료는 영상문화콘텐츠이해 과목의 중간고사를 위한 추가 학습 자료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자료는 수업 중 다룬 주요 개념들을 설명하는 글을 편집한 것으로, 중간고사 문제 풀이에 필요한 핵심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합니다. 더 어려운 부분은 5,6,7주차 영상과 PPT를 통해 이해할 것을 권장합니다.

Full Transcript

*수업 중에 다루었던 주요 개념들을 설명하는 글들을 편집했습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철 학적 개념들이 있어서 다소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가장 쉽게 서술된 글들만 편집을 했습니다. 중간고사 안내 동영상에 말씀드렸듯이, 이 파일만으로도 중간고사를 치시기에 충분하시도록 시험을 준비했...

*수업 중에 다루었던 주요 개념들을 설명하는 글들을 편집했습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철 학적 개념들이 있어서 다소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가장 쉽게 서술된 글들만 편집을 했습니다. 중간고사 안내 동영상에 말씀드렸듯이, 이 파일만으로도 중간고사를 치시기에 충분하시도록 시험을 준비했으니, 자료를 읽으시면서 너무 완벽하게 그리고 꼼꼼하 게 읽어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시험에서 T/F 문제 및 단답형 주관식만을 답할 수 있을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글을 읽기가 너무 어려우시 면 5, 6, 7주차 다시보기 영상과 ppt를 통해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 자료를 ‘완벽하게 이해하시려고 하지마시고’, 전체적인 맥락만을 이 해해주시고, 시험에 나올 수 있을 법한 핵심어들만 챙겨두시면 됩니다. 오픈북으로 시험이 진 행되기 때문에 이 자료를 참고하시면서 답을 찾아내실 수 있으실 정도로만 이해 및 숙지해주 시면 됩니다. 절대로 이 자료를 읽으시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마시고, 아울러 아! 이 교수자가 이런 내용과 핵심어들을 쉽게 풀어내기 위해 대충 20권 정도의 책을 소화하고 전달하는구나! 정도로만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플라톤의 『국가』에 나타난 동굴의 비유 요약 동굴이 있었다. 죄수들은 한쪽 벽만 바라보게끔 고개가 고정되어 있다. 그들은 그렇게 산다. 죄수들 뒤로는 횃불이 있다. 그 횃불이 만드는, 동굴 벽에 비친, 자신들의 그림자만을 보고 사 는 것이다. 이들은, 그림자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죄수들의 목에는 쇠고랑이 쳐져 있다. 그래서 죄수들은 오로지 앞만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한 죄수가, 머리가 깨인다. “이것은 모두 거짓이다. 이 어두컴컴한 곳이 진실일 수 는 없다. 저 바깥에는 분명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쇠고랑을 푼다. 동굴 밖으 로 나아간다. 입구에 다가갈수록 태양 빛에 눈이 부신다. 그가 괴로워한다. 이를 극복 한다. 기어이 밖으로 나간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그 죄수는 환히 빛나는 진짜 태양을, 저 하늘 위 에 있는 진짜 태양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진짜 태양 아래에서 인공물들과 그림자로 봤던 것들의 실재인 ‘이데아’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이 진실 된 세상을 혼자서만 볼 수 없었다. 동료들을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동굴로 되 돌아간다. “모두 동굴 밖으로 나가자. 저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저 횃불은 가 짜이다. 빛나는 태양이 있는 진짜 세상은 따로 있었다. 나를 따라 동굴 밖으로 나가면 너희들 도 그 태양을 볼 수 있다.” 다른 죄수들이, 소란을 피운 그 죄수를 감옥에 쳐 넣어 버린다. 그 리고는 평상시와 같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두들 벽만 바라보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들 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벽에 비친 자신들의 그림자만 바라보도록 강요당한 죄수들이, 동굴 밖으로 나아가서 태양을 보고 돌아온 그 죄수가,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다가 기어이 미친 것이라고 생 각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래서 동굴 안의 치안 유지를 위해 그 타락한 죄수를 감옥 에 쳐 넣은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것으로 소란은 그쳤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은 전과 같이 벽 만을 바라보며 그것이 이 세상의 전부인양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우리들 뒤로 밝게 빛나고 있는 저 횃불보다 더 크고 더 강렬한, 태양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이 그림 자 이외에는 그들의 사고력을 향상시켜 줄 수 있는 다른 사물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그들의 사고가 동굴 속 한 점으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력은 무엇보다 도 시각에 의존한다. 시각을 통제당한 죄수들이, 동굴 바깥세상으로까지 자신들의 사고를 확 장시킬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때 플라톤이 한쪽 구석에서 등장한다. 경거망동하다 감옥에 갇혀버린 그 죄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자네는 평생 감옥에서 살고 싶은가? 나와 타협을 하지 않겠는가? 이럴 바에야 차라리 동굴의 통치자가 되는 건 어떤가? 내가 도와주겠네. 단 조건이 하나 있네. 동굴 바깥 세상에, 진짜 태양이 빛나고 있더라는 소리를 다시는 하지 말게. 이것이 나의 조건이네. 자네 혼자서만 알고 있어야 된다는 말이네.” # 동굴의 비유 해석 동굴의 비유는 동굴 밖과 동굴 안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 알 수 있 는 진리(episteme)의 영역이고 동굴 안은 죄수들이 사는 의견(doxa)의 영역이다. 따라서 동굴 안과 밖은 플라톤 인식론에서 주로 거론 되는 진리의 영역과 의견의 영역에 대한 비유이며 동 굴 밖 보다 동굴 안쪽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의견이 만들어지는 세계에 사는 인간 스스로 반성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의 죄수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죄수들 중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periagoge)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가 그것을 알리려 한다. 동굴의 비유가 묘사하는 상황은 보통의 인간 공동체의 정치적 상황이며 그것은 하나의 연속성을 가진다. 동굴의 비유는 동굴 안 죄수들이 동굴 벽에 비춰진 그림자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죄수들은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상태에서 인형의 그림자만 보고 있다. 이 그림자의 원천은 태 양이 아니라 동굴 안에 피워진 모닥불이다. 인형과 모닥불은 각각 동굴 밖 태양과 여러 실제 사물들의 모방이며 사람들은 이 모방의 모방인 그림자를 진짜라고 보고 있다. 이때 이 죄수들 중 누군가가 사슬을 풀고 고개를 돌려(periagoge) 입구로 오른(anabasis) 다. 그는 담벼락을 지나 인형을 보고, 동굴 안에 피워진 불도 보고 태양을 보면서 자기가 얼 마나 여러 겹의 거짓을 보고 있었는지 알아낸다. 그는 입구로 나가서 태양을 보고, 태양 아래 실제 사물을 보지만 그동안 어둠에 적응 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이 부셔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볼 수 없다. 마치 여태껏 거짓을 알고 있던 사람에게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알려주면 그 진실 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이 동굴 밖으로 나간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빛에 적응해 야 한다. 그는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려(periagoge)동굴안으로 돌 아(katabinein)온다. 그는 돌아오면서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하나는 빛에 대해 적응 했던 것처럼 어둠에 대한 적응이다. 나머지 하나는 어둠 속에서 그림자만 보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의 말을 거짓으로 간주하고 죽이려 드는 위험이다. 그것은 마치 참 다운 진리를 알고 있다해도 그 진리를 곧 바로 적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림자가 투영되는 벽을 보면서 살 수밖에 없는 죄수들의 상황은 보통의 인간 공동체가 처 해 있는 정치적 상황을 말해준다. 거기서 누군가 고개를 돌려 동굴 밖 지성의 영역을 향해 올 라서서 진리인 태양을 구경한다. 그러나 그는 동굴 밖에 머무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간다. 그는 처음엔 지적 호기심 때문에 동굴 밖으로 고개를 돌렸을지 모르지만 그 가 태양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오는 것은 도덕적 실천적 의무감에 의해서이다. 동굴 밖 사물의 모방은 동굴 안의 인형이고 동굴 밖 태양의 모방은 동굴 안의 모닥불이다. 죄수들이 보는 그림자는 이러한 모방의 모방물에 불과하다. 이때,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인형 을 확인하고 모닥불을 지나쳐 동굴 바깥으로 나가면서 동굴 밖 사물과 이 모든 것의 진정한 원천인 태양을 확인한다. 즉 무엇을 ‘안다’는 것은 이러한 단계를 거쳐 진정한 빛의 원인 (aitia)인 태양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앎을 확인한 철학자는 동굴 안의 인간적인 삶과 동굴 밖의 초월적인 삶을 결합시킨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지혜를 사 랑하면서도 실존적인 차원에서 불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보기에 철학자란 동굴 밖의 진정한 올바름의 원천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사람이며 이러한 철학자가 교육자가 되고 현실의 정치를 행하는 통치자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현명하더라도 ‘올바름’에 대한 지도를 받지 못한다면 잘못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이데아론 이데아론은 플라톤이 처음 주장한 형이상학 이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론에서 이데 아는 현상 세계 밖의 세상이며 이데아는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이데아는 현실 세계의 인간에 대한 원인으로, 인간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현상 세계에 인간 이 실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중요한 것은 현상 중요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낡고 사라 지는 것에 반해, 이데아는 시간에도 그 모습을 변치 않으며 현상 세계의 사물들이 궁극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이데아라는 점이다.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만 알 수 있으며, 원래 인간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인간이 현실세계로 오면서 레테의 강 을 건너게 되어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여 이데아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고 주장한 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 핵심개념들 - 미메시스(mimesis) : 그리스어로 춤 · 몸짓 · 얼굴표정 등에 의해서 인간 · 신 · 사물 등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감성계의 개별적 사물은 참된 실재인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하고 이데아보다 낮은 차원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예술도 모방으로 이해하여 이데아의 영상이 라고 하고 감성계의 모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예술을 멸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술 을 모방이라고 하였지만, 언어, 리듬 등을 매개로 하여 모방을 하는 예술(서사시, 서정시, 비 극, 희극, 무용, 음악 등)은 '성격이나 정서나 행위', 요컨대 인간의 마음의 내부를 모방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사태를 재현하는 경우에도 역사와는 달리 '개연적으로든지 필연적으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개별성은 보편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보았 기 때문에, 그에게는 예술의 멸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하는 것과 모 방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서 예술의 유래를 구하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자연의 재현이라고 말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사제가 회중(會衆) 앞에서 연기하는 의식과 배우가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행동의 모방”을 구별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예술적 창조는 미메시스의 형태이다. “이데아의 세 계”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이 창조한 형태이며, 인간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지각하는 구체적인 사물들은 이 이상적인 형태가 그림자처럼 어렴풋이 재현된 것이다. 그는 화가 · 비 극작가 · 음악가 등 예술가는 “모방된 것을 다시 모방하는” 자들이고,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달리 예술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상 · 행동 · 감정을 모방한다고 본다. 또한 예술가는 인간의 행동을 “개연성”의 법칙에 따라서 표현하고, “개연성 없는 가능성보다도 개연성 있는 불가능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그 형 식 속에 있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계와 인간계를 역동적인 변화의 세계로 본 다. 그것은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의 과정이 있는 동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꽃, 동물, 인간은 태어나 성숙해서 죽기 때문에 그런 삶을 흉내 내는 연극도 그와 같은 패턴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신고전주의 작가들은 이와 달리 최고의 고전적 모범을 모방하는 일이 중요했다. - 카타르시스(catharsis): 정화(淨化) ·배설(排泄)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詩學)》 제6장 비극의 정의(定義) 가운데에 나오는 용어.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술어로도 쓰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그리 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중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 되고,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로 순화된다고 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 용(昇華作用)으로 해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관람하는 것은 관람자가 배우의 정서들 을 대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심층적이 며 거대한 고통에 대한 예술가들의 모방은 청중의 가슴에 공포나 연민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 러한 감정을 추방하고 더 나아가서는 관객의 영혼을 정화(淨化)시킨다는 것이다. # 오이디푸스왕 기원전 429년에 최초의 상연 기록을 남기고 있는-그러나 실제 초연은 그보다 앞선 시기로 추정되는-소포클레스의 은 당대로서는 희귀한 몇 차례의 재상연 기록과 아리 스토델레스의 비극론의 모델이 된 작품으로서 그리스 비극, 나아가 서구 비극의 대명사와 같 은 작품이다. 또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빈번히 상연되는 극소수의 공연들 가운데 하나 이기도 한데, 그것이 이 작품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극예술의 형식적 전 범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내용과 주제에 있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획득하기 때문 이다. 무엇보다 오이디푸스라는 인물 은 비극적 주인공의 가장 탁월한 구현으로 여겨진다. 뛰 어난 사고력과 감성, 강인한 의지와 실천력을 겸비한 영웅적 존재이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현대적으로 말하자면 태생적, 성격적 결함-를 벗어나지 못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그의 모습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치명적인 한계를 아울러 드러내고 있다. 성공과 실 패, 상승과 추락을 동시에 겪음으로써, 곧 인생의 정점에 닥쳐온 파멸을 통해 역설적으로 오 이디푸스는 ‘대표적 인간’이 된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그의 보편성은 그가 묻는 질문에 있 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이디푸스의 질문은 서구철학의 기반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 이며 특히 문학예술이 수천 년 동안 되풀이 해 온 주제이다. 그 질문에 대한 의 대답 또한 일반적 보편성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나는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라는 울림 깊 은 대답이다. 극의 내용은 잘 알려진 신화와 같다. 테베의 왕 라이우스는 왕비 요가스타(이오카스테)가 낳 을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리라는 신탁이 두려워 출생 직후 그 아이의 발목을 뚫어 줄 로 동여매고(“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발목이 부어오른 자’라는 뜻이다)산으로 데려가 죽이게 한다. 임무를 맡은 시종은 그를 죽이지 않고 이웃 나라의 양치기에게 건네주고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코린트 왕의 양자로 자라나게 된다. 어느 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코린트 왕을 친부로 생각하고 방랑길에 오른다. 고뇌에 찬 유랑 중 에 어떤 노인과 그 하인들을 싸움 끝에 죽이는 일까지 생기지만, 테베를 위협하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아침에는 네발, 정오에는 두 발, 황혼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은?)풀고, 공석이던 테베의 왕좌에 올라 선왕의 왕비와 결혼하게 된다. 즉위 후 많은 세월이 흘렀을 때 테베가 원 인 모를 역병으로 도탄에 빠지자 오이디푸스는 역병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아폴로 신의 신 탁을 받는다. 신탁은 테베의 전왕이었던 라이오스의 살해자에 대한 신들의 저주가 역병으로 나타난 것이며 그 살해자의 정체를 밝히고 그를 추방하는 것이 역병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이디푸스가 방랑길에 죽인 노인이 전왕 라이오스이며 또 그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 지이고 자신은 결국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음이 밝혀지자, 어머니이자 아내인 왕비 는 자결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뽑고는 스스로를 테베로부터 추방한다. 신화의 줄거리는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하나의 가공되지 않은 질료에 불과하다. 위와 같은 오이디푸스에 관한 연대기적 서술의 느슨한 전개와는 달리 소포클레스의 은 긴밀한 플룻에 의해 사건 진행의 긴장감과 폭발적인 절정, 장엄한 비극성을 성취한다. 먼저 극중 상황의 시발점을 역병 발생 이후 살인범에 대한 신탁을 받는 시점에 설정하여 과거 의 단편적 사실들이 점진적으로 현재 시점으로 되돌아오게 함으로써 시간적으로 압축된 구성 을 이루고 있고, 그 결과 사건의 전모가 일시에 충격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효과를 성취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대로 단 하루의 시간 안에 오이디푸스의 전 생애와 그 참혹한 운명 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이다. 극의 진행은 살인범 색출을 위한 탐문 수사의 형식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가운데 심문자인 오이디푸스와 일련의 증인들과의 연속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대화를 통해 각 인물의 성격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전면에 제시함으로써, 또 이러 한 심문이 오이디푸스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한 탐색과 겹쳐지는 가운데 장면 사이사이에 개재하는 합창대의 노래를 통해 갈등의 의미를 증폭시키고 작가의 주제의식을 명료화하고 있 다. 진실의 발견을 향해 주저없이 발길을 내딛는 오이디푸스가 인간의 지력과 이성, 궁극적으 로는 인간의 자유와 자존을 표상 한다면, 그의 추구를 막는 인물들은 인간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초월적 차원을 수긍하고 운명 앞의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입장 을 대변한다. '사냥꾼과 쫓기는 짐승의 이미지'로 극적 갈등의 물리적 측면을 여실히 표현하는 합창대의 노래는 동시에 '빛과 어둠의 이미지'로 갈등의 이러한 윤리적 차원을 반추하고 있다. 의 비극성은 인생의 정점에 선 한 개인이 운명과 자신 내부의 결함으로 인 해 존재의 가장 낮은 나락으로 추락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다. 신분의 고귀함 뿐 아니라 뛰어 난 지력, 불굴의 의지,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오이디푸스는 만인 위의 인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그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때 오만이 되며 바로 이것이 오이디푸스 의 '비극적 과오'가 된다.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머니를 손에 넣으려는, 또한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항심을 품고 있 는 앰비밸런스적인 심리를 받아들이는 상황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이 심리 상황 속에서 볼 수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욕망을 그리스 비극의 하나 '오이디푸스'(오이디푸스 왕)에 빗대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아이는 어머니를 얻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위치를 쟁취하려고 한다. 남아에게 어머니는 이 성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대상이다. 아이는 아버지와 같은 남자가 되려하는 동일화가 강하게 나타난다. 아이는 곧 아버지를 배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 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무서움을 안다. 처음에는 막연한 불안과 증오만을 품고 있지 않지만, 아이가 실제로 어머니에게 붙어 있으면, 아버지는 "너의 성기를 거세할거야"라고 위협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실제로 말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아이는 이 위협을 무의 식적인 거세 불안으로 느끼게 된다. 이렇게 아이는 딜레마에 빠진다. 어머니를 요구하면, "음 경은 거세된다 "고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무릎 꿇고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어머니의 입장을 이 해한다면, 아이는 "성기가 거세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며, 어느 쪽이든 성기를 유지하기 위 해 갈등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아이는 자신의 성기를 유지하기 위해 근친상간을 하려는 욕망을 포기하고, 또한 아버 지와 충돌하는 일도 포기하고 부모와 다른 방향으로 걸어 나간다. 이렇게 오이디푸스 콤플렉 스는 극복되고, 아이들은 성기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에 진출한다. 그 시기는 잠복기라고하며, 유아적인 욕구(성적 욕망)의 의식화를 억제하고, 대부분 표출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는 두 측면이 생긴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이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모를 버리는 것이지만, 아이는 아버지와 투쟁하기 위하여 "동일화"하고 강한 남성적인 측면 과 아버지에게는 안된다라는 금지 사례를 초자아로 형성될 것이다. 그것은 양심과 윤리감이나 이상으로 유지되고 잠복기 이후의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게 된다. 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갈등을 극복하고, 아이들은 근친상간적인 소망이나 이에 따르는 리비도 그것 거세 불안과 아 버지에 대한 공격 마음 등을 무의식에 억압한다. 이러한 욕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길 때까지 아이의 생각을 그대로 표출되고, 이 갈등과 극복을 계기로 그들은 버려지는 것이 된 다. 이 욕망은 무의식적으로 버려진다. 즉 무의식에 억압된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막연했던 의 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분명하게 형성된다. 아이에게 자아를 파생 분화시키고, 즉 억압에 의해 근친 상간적인 욕구와 거세 불안 등을 무의식적으로 억제하고 현실적인 자아를 만든다. 또한 동일화된 부분과 금지 사항이 합쳐져 초자아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세 가지 정신 구조가 만들 어지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하고 있다.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성격은 원초아(id), 자아(ego) 및 초자아(superego)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각 요소는 자체로 고유의 기능과 요소를 갖고 있지만, 인간의 행동은 거의 언제나 이 세 가지 요소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 원초아(id): 성격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으로 신생아가 지니고 있는 최초의 상태다. 원초아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실세계에서 실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며 억 제할 수도 없다. 프로이트는 모든 에너지는 원초아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 - 자아(ego): 행동을 통제하며 반응할 환경의 특징을 선택하고 어떤 본능을 어떤 방법으로 만 족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성격의 집행자라고 불린다. 원초아와 자아의 근본적 차이는 전자는 마음의 주관적 실재만을 아는 반면, 후자는 마음속의 것과 외계에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원초아는 완전히 주관적이지만 자아는 객관성을 추구한다 - 초자아(super-ego): 초자아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한다. 초자아는 사람의 도덕규범이 며, 원초아의 충동을 억제하고, 현실적인 목표대신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 들뢰즈가 구조와 체계를 왜 거부하는지, 어떤 사유를 펼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 습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인간의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를 독차지하 려고 하지만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에 강력한 장벽에 직면합니다. 아버지라는 거대한 힘 앞에 서 아이는 좌절을 겪습니다. 이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 니다.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처럼 다른 여자를 취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 에서 억압된 욕망은 결핍이 되어 무의식이 됩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에게 욕망은 결핍입니다. 들뢰즈는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욕망은 존재 자체에서 흘러넘치 는 것이며 실재적인 것입니다. 니체는 세계를 힘에의 의지로 이해했고, 스피노자는 코나투스 라는 개념으로 사물이 가진 자기 보존의 경향과 노력을 설명합니다.니체와 스피노자를 수용한 들뢰즈는 존재를 힘에의 의지이자 욕망 그 자체로 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돈이 중요하 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순응적인 노동자로 만듭니다. 이 과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세상에 적응하는 인간의 모습인 동시에 순종하 는 노동자로 영토화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들뢰즈가 자신의 지적 동반자였던 정신의 학자 가타리와 함께 쓴 책 에서 말하려던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직면한 아이는 어머니를 고집할 것인가, 아버지를 받아들일 것인가, 양가감정으로 분열증을 겪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고 정상적인 인간이 된다고 보는 것이 프로이트의 입 장입니다. 사회적으로 말하자면 순종하는 노동자가 되어 자본주의적인 욕망 생산에 종속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의식적 욕망 때문에 순종하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분열증을 겪 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체제가 제공하는 안전한 삶에 안주하며 지낼 것이냐, 존재에서 흘러넘 치는 욕망의 힘으로 새로운 삶에 도전할 것이냐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면 누구나 겪는 문제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 습니다. 그들은 욕망 생산의 노예가 되게 하고, 정신분열을 강요하는 자본의 횡포에서 벗어나 기 위해 자유로운 삶으로 탈주하려는 것입니다. # 들뢰즈의 핵심 개념어 - 영토화와 배치 우리 삶에는 영토들이 존재합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거리를 지나 버스를 타고 학교나 일터 로 갑니다. 이때 집, 거리, 버스, 학교는 일종의 영토입니다. 집은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 가 결합되어 하나의 영토를 이룹니다. 버스는 엔진과 좌석과 운전사라는 개체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영토입니다. 학교는 칠판과 교탁, 책상과 걸상, 선생님과 학생들로 구성된 영토죠. 우리는 여러 개체를 결합해 '영토화'하는 데 익숙합니다. 영토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 제 도, 법들이 존재합니다.버스를 탈 때는 줄을 서야 하고 돈을 내야 하고, 손잡이를 잡아야 합니 다. 학교에서는 책상과 책과 연필을 두고, 걸상에 앉아 칠판을 봐야 합니다. 수업시간을 지켜 야 하고 떠들면 안 되죠. 이런 규칙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일종의 코드 들입니다. 들뢰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과 제도들이 고착되는 현상을 '코드화'라고 부릅니 다. 영토화, 코드화는 고착화를 의미합니다. 고착은 기계적 반응을 양산하는 동일성의 지배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매일 같은 생활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고착화되었음을 의미합니 다. 동일성이 반복되는 세상에서 존재의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모든 아이가 유튜버가 되려 하 고, 모든 어른이 건물주가 되려 합니다. 차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영토화, 코드화가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영토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코드들이 작동하는 일종의 '배치'로 이루어집니다. 집, 버스, 회사, 교실, 야구장, 도시 등은 모두 배치입니다. 거 실만 해도 소파, TV, 책장, 협탁, 화분 등의 다양한 요소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배치에는 보이지 않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TV가 중요한 집은 거실 한가운데에 TV가 있고, 책을 보려는 집은 책장이 중심에 있습니다. 사무실은 생산선을 높일 수 있도록 감시와 통제가 용이 하게 배치됩니다. 버스에는 순환의 욕망이, 교실에는 지식 전이의 욕망이, 야구장에서는 게임 을 위한 욕망이 작동합니다. 욕망이 배치를 만들고 영토화하는 것입니다. 푸코식으로 말하면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죠. 요즘은 학교에서 토론식 수업을 많이 합니다. 교사와 칠판만을 바라보는 과거의 수업 방식에서 벗어나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바뀌 었습니다. 예전 수업보다 진일보한 면으로 이해됩니다. 들뢰즈식으로 이해하자면 재영토화입 니다. 수업 듣는 기계에서 토론하는 기계로새로운 기계로 탄생한 것입니다. 토론하는 기계는 창의성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투영된 새로운 배치의 결과입니다. 더는 자본 증식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주입식 교육의 문제를 새로운 배치로 풀려는 시도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토화, 코드화, 배치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삶은 기존의 배치를 유지하고 지속하려는 욕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코드화된 삶의 방식에 따라 기존의 배치와 관계를 유지하려는 권력 또한 작동하고 있죠. 하지만 기존의 배치에서 탈주하거나 재 배치하려는 욕망 또한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세계는 이런 욕망들이 충돌하는 곳입 니다. # 배치, 영토화, 탈영토화, 되기 ‘배치’는 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 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 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 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 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 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 재인 셈이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 치’도 있다. 야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야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 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 구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 의 운명인데, 이 차이생성의 일시적 응결 형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 이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 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 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 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리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 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 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 복하기 위한 사유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 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토대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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