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예비고1 주차별 클리닉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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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document appears to be a biography of a Korean individual named Yu Ja-pil. The text details his life and characteristics and mentions his interactions with other individuals and events. It also discusses historical and cultural information related to hi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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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소전 한 친구가 있었다. 그냥 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 사람에 불과한 친구였다. 그러나 여느 사람처럼 이 땅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마는지 하게 그럭저럭 살다가 제물에 흐지부지하고 몸을 마친 예 사 허릅숭이는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유재필(兪...
유자소전 한 친구가 있었다. 그냥 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 사람에 불과한 친구였다. 그러나 여느 사람처럼 이 땅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마는지 하게 그럭저럭 살다가 제물에 흐지부지하고 몸을 마친 예 사 허릅숭이는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유재필(兪哉弼)이다. 1941년 홍성군 광천에서 태어나 보령군 대천에 와서 자라고 배웠다. 그리고 그 나 머지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총기와 숫기로 또래에서 별쭝맞고 무리에서 두드러진 바가 있어, 비 색(否塞)한 가운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여러모로 일찍 터득하고 앞서 나아감에 따라 소년 시절은 장히 숙성하고, 청 년 시절은 자못 노련하고, 장년에 들어서서는 속절없이 노성(老成)하였으니, 무릇 이것이 그가 보통 사람 가운데서도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게 된 바탕이었다. 그의 생애는 풀밭에서 뚜렷하고 쑥밭에서 우뚝하였다. 그는 애초에 심성이 밝고 깔끔하였다. 매사에 생각이 깊고 침착하였으며, 성품이 곧고 굳은 위에 몸소 겪음한 바와 힘써 널리 보고 애써 널리 들은 것을 더하여, 스스로 갖추어진 줏대와 나름껏 이루어진 주견(主見)으로 갈피 있는 태도 를 흩트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주변머리 없이 기대거나 자발머리없이 나대어서 남을 폐롭히거나 누를 끼치는 자는 반드시 장마의 물걸레 처럼 쳐다보기를 한결같이 하였고, 분수없이 남을 제끼거나 밟고 일어서서 섣불리 무엇인 척하고 으스대는 자는 “삼국 지”에서 조조 망하기를 기다리듯 미워하여 매양 속으로 밑줄을 그어 두기에 소홀함이 없었다. 또 모름지기 세상의 일 에 알면 아는 대로 힘지게 말하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숫지게 말하여 마땅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떳떳지 못 하게 주눅부터 들어서 좌우의 눈치에 딱 부러지게 흑백을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말만 한 딸을 서울 가게 하 는 데에 힘입어 그날로 이자 돈을 놓는 매몰스런 구두쇠를 보듯이 으레 가래침을 멀리 뱉기에 이력이 난 터이었다. 그의 됨됨이는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체취는 그윽하고 체온은 따뜻하며 체질이 묵중한 사내였다. 또한 남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임을 깨달아 아픔을 나누고 눈물을 나누되, 자기가 아는 바 사람 사는 도리에 이르기를 진정으로 바라던 위인이었으니, 짐짓 저 옛말을 빌려서 말한다면 그야말로 때아닌 특립독행(特立獨行)의 돌출이요, 이른바 “세상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그들보다 앞서서 걱정하고,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함을 본 연후에야 즐거움을 누린다.”라고 말한 선비적인 덕량(德量)의 본보기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친구였다. “이간감? 나 유가여.” 그가 내게 전화를 할 때마다 매번 거르지 않던 첫마디였다. 그렇지만 유가는 이미 다른 사람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는 유자(兪子)였다. 유자는 직업적인 문필가에 못지않은 뛰어난 어휘 감각으로 이 나라 문단의 제자백가들과 교유를 하면서도 언제나 대 화의 선도(鮮度)를 유지했거니와, 그 중에서도 보령 지방의 방언 구사에서는 그와 겨룰 만한 사람이 드물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대개 일정한 지역의 방언은 그 유통 구조적인 한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르죽어서 종당에는 용도 폐기를 면치 못하 기가 쉽고, 그로부터 호흡이 끊기고 박제화(剝製化)하여 사전(辭典)에 정리되고 나면 한갓 현장을 잃은 고어나 은퇴어 가 되고 말아서, 모처럼 어디에 갔다가 만나더라도 뜨악하고 서먹해지게 마련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잊은 지가 언젠지조차 모르는 귀꿈맞은 방언이라고 해도, 그것이 유자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는 그 말 이 지닌 본래의 숨결까지도 고스란히 살아 있어서 생각지도 않은 신선한 느낌마저 덤을 얹는 것이었다. 그만큼 일상적 으로 즐겨 사용해 온 탓이었다. 보령 지방의 독특한 방언 가운데 지금도 흔히 쓰이는 것은 ‘개갈 안 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요즈음 산하의 국어 연구원에서 의례적인 용어부터 정립해 주기를 독려하고 있는 이어령 문화부 장관도 사석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곧잘 튀 어나오던 방언이기도 한 것이다. 이 ‘개갈 안 난다.’는 말은 보통 ‘말이’ 맺고 끊는 맛이 없다거나, 섞갈리거나, 요령부득이다. ‘뜻이’ 가당치 않거나, 막연하거나, 어림도 없다. ‘일이’ 매동그려지지 않거나, 매듭이 나지 않거나, 마무리가 없다. ‘짓이’ 칠칠치 못하거나, 갈피가 없거나, 결과가 예측 불허다, 따위와 비스름한 의미로 쓰이고 있거니와, 나도 그 어원이 ‘가결(可決) 안 나다’에 있는지 어떤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는 터이다. 한번은 내가 짐짓 해보는 말로, “대관절 그 개갈 안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이라나?” 유자더러 물었더니, 유자 대답하여 가로되, “아, 그 개갈 안 난다는 말처럼 개갈 안 나는 말이 워디 있간 됩세 나버러 개갈 안 나게 묻는다나.” 하고 사뭇 퉁명을 부리는데, 그러는 그의 표정을 읽으니 말이 난 계제에 아예 어원까지 캐서 적실하게 밝혀 줄 수만 있다면 작히나 좋을까만, 하나 말인즉 원체가 ‘개갈 안 나는’ 말인지라 당최 종잡을 수가 없어서 유감이라는 내색이 역 연하였다. 재주가 메주인 이런 삼류 작가에게는 유자만큼 소중하고 요긴한 위인도 드물었다. 그는 내 직업에도 여러 가지로 도 움이 되었는데, 이를테면 1950년대부터 고향과 멀어진 까닭에 ‘잊은 지가 언젠지조차 모르는’, 그래서 모처럼 한번이나 들어 보더라도 뜨악하고 서먹할 수밖에 없는 궁벽한 방언들을 아주 새삼스럽게, 그것도 그 말이 지닌 본래의 숨결까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그대로 재생시켜 주면서 ‘말하는 방언사전’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던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비단 방언만도 아니었다. 그가 사무적으로 왕래하는 각계각층의 전문적인 용어를 비롯하여, 가령 벌면 먹고 놀면 굶는 뜨내기들, 빈손이 큰손이요 끗발이 맨발인 따라지들, 심지어는 보다보다 볼장 다본 막살이들의 헙헙한 허텅지 거리와 종작없는 결말들까지도 나는 거의가 그를 통하여 얻어들었으며, 또 무슨 말이든지 일단은 힘 하나 안 들이고 주 워대는 그의 입을 거쳐야만 비로소 제대로 실감이 나고, 나중에 용도를 가름하는 데에도 수나로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유자는 그가 아니면 안 되는 그 걸찍한 입담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모든 것이 바로 신선한 소재이기도 하였다. 한 예 를 들면 중진작가 천승세 씨의 장편 소설 ‘사계의 후조’도 곧 유자를 모델로 하여 이룩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내가 오래전에 쓴 ‘그가 말했듯’이란 졸작의 주인공도 유자가 모델이었다. 주인공이 일인칭인 이 소설을 본 사람들 은, 읍내에 말시바위(곡마단)가 들어와서 악사들이 말에 원숭이를 태워 앞세우고 트럼펫 가락도 심란스럽게 가두선전에 나설 때마다 철딱서니 없이 단기(團旗)의 기수가 되어 우쭐거리는 주인공을 나의 과거사로 짐작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 다는 거였지만, 실은 유자가 그렇게 보낸 소년 시절이야말로 한쪽은 하릴없는 허드레 웃음거리였고, 한쪽은 공연히 웃 어넘길 수만도 없는 애틋한 대목이 안팎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유자는 육이오 난리 이듬해에 한내(대천)의 구장태로 이사 오면서 대남국민학교에 전학하였다. 그는 전학하고 며칠이 안 되어서부터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었다. 아무 데서나 주워대는 그 입담이 밑천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밥 먹을 때 모 이를 먹고, 다른 아이들이 죽 먹을 때 여물을 먹었는지, 나이답지 않게 올되고 걸었던 그 입은, 상급생이나 선생님들 앞에서도 놓아먹인 아이처럼 조심성이며 어렴성이라곤 없이 넉살 좋게 능청을 떨어 대었던 것이다. 일테면 여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교문 밖에 나가서 딴전을 보다가 늦게 들어온 그를 불러 세우고 왜 늦었느냐고 다잡 으며 따끔하게 혼내 줄 기미를 보이면, “일 학년짜리 지집애가 오재미루 찜뿌를 허다가 사리마다끈이 째서 끊어져 흘렀는디, 그냥 보구 말 수가 웂어서 그 것 좀 나우 잇어 주다 보니께 이냥 늦엇번졌네유.” 하고 ‘힘 하나 안 들이고’ 넌덕스럽게 너스레를 떨며 둘러방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대로 두었나? 그대로 두었다. 학교에서도 초저녁에 싸가지 없는 아이로 치부하여 매를 들고 성화대거나, 어머니까지 오너라가너라 하면서 닦달하느니보다, 숫제 배냇적부터 마치 우진마불경(牛嗔馬不耕)의 원진살이라도 타고난 녀석인 양 내놓아 버리 는 것으로써 차라리 속이나 편키를 도모한 셈이었으니, 마침내 교감 선생님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름을 모르면 대남 학교 아이가 아닌 줄로 여기게끔 명물이 되기에 이르렀다. 명물은 되잖게 입만 되바라졌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보매보다 반죽이 무름하고 너울가지가 좋아 붙임성이 있었고, 싸움 난 집에서 누룽지를 얻어먹을 만큼이나 두 룸성이 있었으며, 하다못해 엿장수를 상대로 엿치기를 해도 따먹은 엿 토막이 앞에 수북할 정도로 눈썰미와 손속이 뛰 어난 터수였다. 나이가 한참이나 위인 중학생들과 예사로 너나들이를 하고, 가는 데마다 시답지 않은 성님과 대가리 굵 은 아우가 수두룩했던 것이 다 그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던 일이었다. 그 천연덕스럽고 숫기 좋던 붙임성은 말시바위가 들어올 적마다 맡아 놓고 모갑이(우두머리)를 찾아가서 단기의 기 수로 자원하는 데에도 단단히 한몫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깃광목이나 무색 인조견 바탕에 ‘뉴―서울 써커쓰’ 따위가 쓰인 깃대를 들고, 그 모양 나던 뒤듬발이 걸음으로 가두선전반을 이끌었다. 바람이라도 있어서 기장폭이 펄럭거리는 날은 깃대를 가누기는 고사하고 제 몸뚱이조차 고루 잡기에도 힘이 부쳐 엎드러질지 곱드러질지 모르게 비칠거리면서 땀으로 미역을 감게 마련이었다. 그는 땀으로 미끈거 리며 주책없이 자꾸 벗겨져 주천스럽던 고무신은 일찌감치 벗어서 허리춤에 차기를 잊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러고 까 불거리면서 장터를 휘젓는 풍신이 바로 한내 사람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됐던 사실은 알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가 번번이 기를 쓰고 기수가 되고자 안달을 했던 것은, 겨우 무료 봉사에 한해서 무료입장을 보장했던 그 지지한 미끼에 눈이 가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초엽 어름에 잠깐이었다. 하루는 난리 때 노무자로 갔다 와서 육장 싸전머리에 노박이로 나앉아 지겟 벌이를 하던 이웃집 논규아배가 보다 못해 한마디 나무랄 요량으로 핀잔을 하였다. “이녀리 자슥은 밤나…… 너넌 뭣 땜이 말시바우만 들왔다 허면 그리구 혹해서 사죽을 못 쓰구 댕긴다네?” 그는 서슴없이 대꾸하였다. “그게 워디 그냥 싸카쓰간유. 사리마다만 입은 지집애덜이 사까다찌를 해 쌓는디, 기도 보는 이가 여간 사람이 아닝 께 그거래두 해주구서 봐야 션허지 워치기 그냥 만대유.” 대남학교 사학년 때의 대답이었다. 그는 싸전마당 한복판에 빙 둘러 쳐 놓은 포장 어디에 혹 개구멍이라도 없나 하여 우물쭈물 쭈삣거리면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얼씬거리다가 막대기로 삿대질을 하며 지키는 단원에게 걸리적거리고 성가시다며 지청구를 얻어먹어 풀이 죽은 아이들 앞에서 여봐란 듯이 무료입장을 하였다. 그리고 깔아 놓은 멍석 귀퉁이에 옹송그리고 앉아서 이따가 그 쥐 잡아먹은 것 같은 입술의 해반주그레한 계집애가 나와서 재주부리는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나 공구경도 속이 든든 해야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여린 삭신에 저보다 서너 길이 넘는 깃대에 시달려 옷이 척척하도록 땀을 흘리며 읍 내를 헤맨 터에, 점심 굶고 저녁 걸러 곤할 대로 곤하고 허기진 몸이, 기름독에 빠졌다 나온 사내가 버나(접시돌리기) 를 한들 보이고, 쥐 잡아먹은 입술이 통굴리기를 한들 보일 리가 없었다. “인마, 어여 집이 가서 자빠져 자.” 그는 매양 소스라치면서 눈을 떴다. 깨어 보면 막은 아까아까 내린 뒤였고, 구경꾼이 두고 간 쓰레기와 썩음썩음한 멍석에 쌓인 답쌔기를 쓸던 단원이 대빗자루로 등짝을 냅다 갈기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앉은 채로 곯아떨어져 있다가 그렇게 실없이 혼이 났을 따름이었다. 야간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집집이 불을 끄고 찬바람만 휑하던 골목길은 만날 그 앞으로 지나다니는 가겟집들의 굴뚝 모퉁이마다 왜 그렇게도 껄쩍지근하고 떨떠름하니 무서웠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아무리 오금탱이가 저리고 당겨 도 뜀박질은 하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져서 반도 넘게 놓친 것도 그리 억울하지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캄캄한 오밤중 임에도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샤 왕자, 어쩌고 하며 그 무렵에 한창 유행하던 노래를 콧소리로 흥얼거렸다. 밤길에 노래를 하면서 가다 보면 무섬증이 훨씬 덜했으니까. 그리고 다음날도 기수를 맡아서 보다가 못 본 것들을 마저 보게 되려니 하면 다시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오락가락하던 무렵에는 싸전마당에 화면이 홑이불만한 ‘대한 뉴―스’나 ‘리버티 뉴―스’가 고 작이던 한내에도, 난리가 시나브로 꺼끔해진 뒤로는 가끔 가다 활동사진(극영화)도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되게 수리목 지른 변사가 혼자서 열두 가지 소리를 내던 벙어리영화(무성영화)가 들어오고, 확성기가 끌탕이어서 차라리 벙어리영화 가 낫던 발성영화도 들어오고, 그런가 하면 어쩌다가 천연색영화까지도 들어오는 것이었다. 말이 천연색이지 영화에서 는 어리중천에 해가 쨍쨍한데 화면에서는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 가랑비가 줄창 쏟아지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바야흐 로 볼 만한 대목에 이르렀다 싶으면 제멋대로 필름이 툭 하고 끊어졌다가, 앞에 앉은 영감이 독한 파랑새 담배 한 대 를 거진 다 태운 뒤에야 아까 그 대목은 훌쩍 건너뛰고 생판 딴 장면이 튀어나오던 서부활극이 그 주종이었다. 천연색 서부활극에도 변사가 따랐다. “아, 저 인디안을 잡아라, 놓치면 영화 끝난다. 그러자 그때 저 인디안을 향하여 마상에 높이 앉아 황야를 달려가는 한 사나이가 있었던 것이였었으니, 자, 그는 과연 누구라는 사나이였었던 것이였었더냐. 그렇다, 그 사나이는 바로 우리의 톰이라는 사나이였었던 것이였었던 것이였었다…….” 목통이 다 닳아 버린 목소리로 ‘것이었었던 것이었었다’를 즐기던 변사가 그렇게 따라다녔던 것은, 그때까지도 우리 나라엔 화면에 자막을 넣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터이었다. 일제 때 지은 농업 창고에서처럼 한동안 가마니때기 를 깔고 볼 수밖에 없었던 면공관조차 아직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장터의 한 골목을 양쪽으로 막은 노천 가설극장에서 그나마 어중간하여 비라도 오는 날이면 초장에 구경을 품메는 편이 나을 성싶은데도 본전 생각에 못내 자리를 못 뜬 채, 보면서 젖고 가면서 얼고 해도 별로 흉이 아니었던 시절의 일이었다. 구경이라면 제백사하던 취미에 하물며 활동사진이 들어올 때였겠는가. 유자는 영화가 들어올 때에도 남에 없는 부지 런을 떨어서 이른바 샌드위치맨이 되기를 자원하고 나섰다. 앞뒤로 포스터를 붙인 널빤지 거지게를 짊어지고, 일껏 다 려 입힌 바짓가랑이를 양잿물에 삶아도 소용이 없도록 휘지르면서, 걸어 다니는 광고판 노릇으로 골목골목을 쏘다니기 에 숙제 한 번을 제대로 해간 적이 없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역시 웃느라고 짜장면 한 그릇 먹어 보란 말이 없었던 생 고생을 사서 하는 일이었으니, 무료봉사에 무료입장의 원칙은 개똥 모자 비껴쓰고 사람을 돌려 먹는 흥행업자나, 중절 모자 제껴 쓰고 기계를 돌려 먹는 흥행업자나 매양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비록 걸어 다니는 광고판 노릇이었을망정 무더운 여름철에는 엄벙덤벙하고 덤벙거리다가 더러는 남의 손에 빼앗기는 날도 없지가 않았다. 그가 점심시간이나 보건시간(체육시간)에 학교에서 빠져나와 아수꾸리(아이스케이크)통을 메고 돌아 다니다가 쇠전마당 근처에 전을 벌이고 떠드는 약장수 구경에 넋을 놓아 한참씩이나 충그리게 된 결과가 그것이었다. 그래도 영화는 빠뜨리지 않고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면공관에 문지기나 들무새로 있던 상이군인 아저씨의 연애편 지 배달원으로 선발되어, 주막 강아지 부엌 드나들듯이 꺼먹고무신이 달창이 되도록 들락거리고 다닌 보람이었다. 성냥 하면 천안 조일표, 고무신 하면 군산 만월표밖에 몰랐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은 우둥퉁한 노파가 되어 십중팔구 하염없 이 추억이나 되새기고 있을 조미령이 일쑤 새파란 과부로 분장하고 나와서, 밥만 먹고 잠만 자던 촌사람들의 무딘 가 슴을 이리 집적 저리 집적하여, 육백을 치면서 조인다고 조여도 국진 열끗이 목단 열끗으로밖에만 안 보였던 어수룩하 던 시절의 일이었다. 내가 유자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한 달포나 됐나 해서였다. 그날은 첫 시간이 수학시간이었는데 수학선생이 결근을 하는 바람에 옆반하고 합반으로 수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국민학교에서도 내내 셈본만큼은 50점을 넘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기하고 대수고 간에 수학시간이라고 하면 으레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이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니 수학선생의 결근은 선생의 사정 여하를 떠나서 무슨 경사를 만난 것이나 진배없이 반가워하였고, 그날은 단지 수학시간을 까먹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온종일 흐뭇 한 기분에 젖어서 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무턱대고 그리 좋아만 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옆 반의 시간표에 맞추어 합반으로 때워야 할 시 간이 하필이면 실업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업선생은 싸낙배기였다. 성질이 벼락인데다가 툭하면 불러내서 덮어놓고 매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어금니 꽉 다물어, 안 그러면 이빨 안 남어나.” 실업 선생은 불러낸 아이에게 그렇게 미리 겁을 준 다음, 두 주먹으로 두 볼을 번갈아 가면서 사정없이 처돌리는 것 이 장기였다. 손도 여간 맵지가 않았다. 한 대만 맞아도 눈에 불티가 일면서 머리가 휘둘리어 어질어질하였다. 그래서 실업시간만 되면 죄다 지레 얼겁이 들어서 선생이 수업을 마치고 나갈 때까지는 교실에 실업선생 외에는 아무도 없었 던 것처럼 허망할 뿐 아니라 공기도 끄무러진 날씨처럼 한없이 무거울 뿐이었다. 그날의 그 시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한 반이 70여 명이나 되어 여유가 없는 교실에, 두 반이 뒤섞이어 둘씩 앉기에도 빠듯한 걸상에 넷씩이나 엉겨 붙으니 앞이고 옆이고 복잡하여 옴나위를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 도 수업이 시작되자 먼지가 자욱하던 교실이 이내 없는 집 장광처럼 조용해졌다. 누군들 잡음 한마디라도 새어나갈세 라 감히 조심하지 않을 수 있을손가. 그런 와중에도 수업이 시작된 지 한 5분쯤 하여 드르륵 하는 문짝 소리도 요란하게 뒷문을 밀고 들어오는 지각생이 있었다. 재빨리 훔쳐보니 키는 중간 키요, 두툼하고 너부데데한 얼굴에 눈은 까닭 없이 작고 코는 쓸데없이 크막한 옆 반 아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그 유자였다. 너는 죽었다…… 나는 그렇게 줄을 치면서 나부터 숨을 죽이고 뻔한 순서를 기다렸다. “싈…… 저놈의 자식은 또 왜 지각이여?” 실업 선생은 성깔을 있는 대로 얼굴에 모으면서 뼛성 있는 억양으로 물었다. 나는 나더러 물은 것이나 다름없이 숨 이 막힐 지경인데 그 아이는 뜻밖에도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었다. “거시기, 저 교문 앞서 자즌거포집 가이가 워떤 집 수캐허구 꿀붙었는디, 여적지 안 떨어져서 늦었슈.” “나불거리지 말구 들어가 앉어.” 실업 선생은 불러내어 주먹을 쓰기는커녕 금이빨을 반짝이면서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가 호랑이 선생에게서도 간단히 면허를 따던 순간이었다. 저 선생님도 왕년에 누구한테 이빨이 안 남아나서 저렇게 금니를 한 것인가, 나는 얼핏 그런 엉뚱한 생각도 들었으 나, 그 시간이 다 가도록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저런 천둥벌거숭이가 어떻게 하여 3대 1이나 되었던 경쟁을 이기고 중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는 그 뒤로도 선생의 출석부가 그의 머리통에 떨어지는 것을 심심치 않게 구경할 수가 있었다. 누구하고 다툰다거 나 선생이 발끈하도록 일을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그는 운동 신경이 젬병이어서 아이들과 툭탁거리는 일 따위는 애초 에 엄두도 내지 못하던 둔발이었다. 그러므로 출석부가 그의 머리통에서 둔탁한 소리를 냈던 것은, 기껏 해서 처녀 선 생님을 ‘우리 아줌니’라고 부른다거나, 교감 선생님을 ‘꼬깜(곶감)’으로 부르다가 들켰을 때뿐이었다. 호랑이 선생에게서까지 면허를 딴 터였으니 다른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하나마나한 일이다. 그는 정학 한 번 맞아 본 일이 없이 학교를 마쳤다. 나하고는 물론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가 시들하게 지낸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첫째는 3년 동안에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어 본 일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 번잡하고 어수선한 아이와 한반이 되지 않은 것을 늘 다행으 로 여기고 있었고, 그는 또 그 나름으로, 지지리 못나 터져서 아무 존재도 없이 한갓 소설책 나부랭이나 들여다보는 것 이 일이던 나를 처음부터 쳐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존재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지금도 불현듯 생각나는 일이 있다. 2학년도 다 돼서였다. 하루는 무슨 일인가로 담임 선생의 호출을 받아 교무실에 갔더니, 입학하고부터 줄곧 생물과 미술을 담당하여 일 주일에도 너더댓 시간씩이나 교 실에 들어왔던 백 모 선생이 내 얼굴과 명찰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나서, 암만 봐도 처음 보는 아이란 듯이 이러고 묻는 것이었다. “야, 너는 워느 반 애냐?” “일 반인디유.” “니가 왜 일반여?” “기유.” “일 반에 너 같은 애가 워딨어?” “있슈.” “원제 전학 왔는디?” “입학허구버터 여태 댕겼는디유.” “집이 워딘디?” “대천유.” “그럼 대천 국민핵교 댕겼게?” “그렇지유.” “그려? 그런디 왜 그렇게 통 존재가 웂어?” 이태 동안이나 두 과목을 가르친 선생도 못 알아보던 무존재였으니, 그 유명하던 아이가 나 같은 것쯤 안중에도 없 었을 것은 열 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일제 고사니 기말고사니 하는 것에 한 번도 긴장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시험 시간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던 것이 소설책이었다. 어린것이 소설책을 읽으면 어려서부터 사람 되기 다 틀린 줄로 알고 눈 밖으로 보던 어지 간히 무식했던 시절의 일이었다. 유자와 나는 중학교 입학으로 만나고 중학교 졸업으로 헤어졌다. 가는 길도 달랐다. 그는 한내에 주저앉아 직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숙부가 주관하여 지어 주는 농사가 있었으니 사는 것이 급해서가 아 니었다. 대남학교 3학년 때 점심시간마다 몰래 나가서 아이스케키통 메었던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그가 미처 뼈도 여 물기 전에 학업보다 직업을 먼저 생각했던 것은 오직 유별난 장난기와 호기심, 그리고 하루도 진드근히 앉아 있지 못 하는 왕성한 활동의지의 작용이었다. 호기심의 첫 대상은 면공관의 영사기였다. 곡마단의 기수와 걸어 다니는 광고판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그는 면공관의 영사기사처럼 부러운 것이 없어서 그 조수가 되기를 자원했다. 역시 무료 봉사였다. 그러나 영사기사 의 꿈은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영사기가 한 번 고장나면 근방에서는 고칠 데가 없어서 행여 함부로 만질세라 기계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하였으니, 얼마를 쫓아다녀도 영사기에 대한 요리를 익힐 기회는 도무지 가망 성이 없었다. 한내 장날은 여전히 자동차보다 소달구지가 붐벼서 교통이 복잡하던 시절이라 전축은 그만두고 유성기조 차 드물었고, 그리하여 명문당 옆댕이에 있는 기쁜소리사를 아무리 주살나게 드나들어도 영사기 비슷한 것은 고사하고 일껏 고쳐 봤자 며칠이 안 돼서 도로 바글대는 제니스 라디오 따위나 구경하고 말 뿐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보아 둔 것은 있었다. 노천 가설극장에서나 쓰이던 확성기의 배선 요령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은 어디까지나 요령이었지 기술은 아니었다. 그러니 기술 축에도 못 드는 그까짓 것을 장차 무엇에 써먹는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꼭 한 군데 필요한 경우가 있었다. 때는 어언간에 자유당이 말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국회 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에 대한 탄압이 벌 건 대낮에도 버젓이 벌어졌다.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 겸 후보의 개인 유세장마다 직업적인 선거꾼이 몰려다니며 확성 기 줄부터 끊어 놓고 난장판을 벌였다. 유자는 그럴 때마다 확성기 줄을 손보아 주었다. 쇳덩이나 다름없이 무거운 확성기를 걸머메고 생쥐들도 미끄러워서 꺼려하던 가가의 함석지붕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리며 확성기를 설치하는 일도 그가 자청하고 나선 일이었다. 어린 소 견에도 여당의 횡포에 반감이 일었던 것이며,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야당의 일손을 거들게 된 것이었다. 위원장은 그의 올바른 심성과 용기를 기특하게 여겨 동지로서 대하였다. 전례에 따라 무료봉사에 무자격 입당이 이 루어졌다. 천진난만한 정의감이 미성년 선거 운동원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위원장과 함께 지프를 타고 관내를 누비는 동안에 그 유별난 장난기와 호기심이 다시금 들먹이기 시작했다. 선거 운 동원들이 비계 한 점에 막걸리 한 사발로 요기를 하면, 그도 덩달아서 비계와 막걸리로 끼니를 에우게 되었다. 같은 또 래의 아이들이 겨우 사춘기의 문턱에 이르렀을 무렵 그는 단계를 건너뛰어 성인들의 세계를 넘성거리게 된 것이었다. 지프를 타고 다니다 보니 그의 호기심은 틉틉하고 트릿한 막걸리에만 머물지 않고 자동차 운전으로 옮겨 갔다. 운전 은 기술에 속하는 것이었다. 운전수가 되기로 작정하니 이번에는 오던 기회가 달아났다. 선거는 끝나고 위원장은 낙선이었다. 기를 펴볼 날이 갈 수록 멀어지는 것이었다. 생기는 것 없이 야당붙이가 되고, 따라다니다 보니 발이 넓어지고, 그렇게 지내고 있으니 씀씀이만 커지고 하여, 날 이 좋으면 좋아서 심란하고, 날이 궂으면 궂어서 심란하고 하던 그에게도 드디어 반짝 경기가 슬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반짝 경기의 내용은 사월 혁명의 여덕을 누리는 일이었고, 무료 봉사를 졸업하는 일이었고, 서울 생활을 수습하는 일이 었다. 사월 혁명 직후의 총선에서는 위원장의 낙승이었다. 민주당 신파의 참모이자 장면 씨의 측근으로 3선 의원이 된 위 원장은, 민주당의 신파가 정부를 맡게 되자 대번에 재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다. 그도 위원장의 자택에 입주하였다. 정치 식객으로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동거인이 된 거였다. 직책은 무엇이었든 오 랫동안 움츠렸던 기를 펴보기 위해서는 당장 있어야 할 것이 대외용 명함이었다. 쓸쓸했던 집의 자제들이 넉넉해지면 조상들의 무덤치레부터 하여 행세하려 드는 심정으로 명함을 찍어 가지고 다녔다. 직함은 민의원 의원비서관이었다. 명 함은 숫기 좋고, 반죽 좋고, 붙임성 있고, 두룸성 있는 외에, 입담과 장난기와 호기심을 겸비했던 그에게 두 발에는 발 동기가 되고, 두 팔에는 팔랑개비가 되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명함이 없을 때는 되는 일이 없더니, 명함을 쓰면서부터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신분은 장관을 겸직한 의원의 자택 동거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활동의 주권은 그 자신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그 명함으로부터 나왔다. 입대할 나이가 되었으나 생각이 없어서 미루적거렸더니 시나브로 병역 기피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대증을 만들 어서 넣고 다녔다. 정치 식객들과 어울리다 보니 대학 졸업장도 필요할 듯하였다. 그래서 대졸 학력을 만들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명문 대학 졸업생으로 구색을 갖춘 것이었다. 그랬으나 만든 학력을 활용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듬해 오월의 군사 정변이 먼저 들이닥친 것이었다. 집주인이 부정 축재자로 몰려 잡혀갔다. 동거인도 끌려갔다. 그가 안내된 곳은 그 자리에 있는 것들만 쓰더라도 그 한 몸 뼈를 추리기에는 일도 아닐 듯한 방이었다. 수사관은 소지품을 뒤어내어 명함이 나오자 보기보다는 딴판이란 듯이 무슨 명색의 비서였느냐고 눈을 부라렸다. “저는 가정 비서였는디유.” 그가 엉겁결에 둘러댄 말이었다. 수사관은 듣다가 처음 듣는 직종이라 싶은지 구체적인 내용을 다그쳤다. 그는 기중 무난할 성부른 것으로만 주워 대었다. “보일라실두 드나들구, 시장두 왔다갔다허구, 마당에 빗자루질두 허구…….” 그는 털어 봤자 담배 부스러기밖에 나올 것이 없는 몸이기에 그 이상의 닦달을 면할 수가 있었다. 오막살이가 무너져도 아궁이하고 굴뚝은 남는 법인데, 재무부장관 집이 한물 가버리니 그에게는 장항선 기찻삯도 근 근하였다. 한내로 돌아왔다. 길은 이제 한 군데밖에 없었다. 군대 가는 길이었다. 군대에 가면 숟가락도 놓기 전에 꺼지는 배로 하여 허천들린 듯이 껄떡대던 시대였지만, 그의 병영생활은 훈련병 시 절부터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었다. 입이 벌어먹인 덕이었다. 논산 훈련소로 가는 길은 먼저 홍성읍에 집결하여 가다 서고 가다 서고 하는 완행열차로 천안까지 올라왔다가 대전 으로 꺾어져서 호남선을 갈아타는 노정 탓에, 으레 낮차가 밤차 되고 밤차는 낮차가 되어야 비로소 자리를 털고 일어 설 수가 있었다. 그가 홍성에서 자리를 잡은 옆자리에는 중씰한 연배에 주제꼴이 꾀죄죄하면서도 생긴 것보다는 땀내가 한결 덜한 사 내가 앉아 있었는데, 그이가 온양에서 내릴 때는 몰랐다가 차가 뜨고 난 뒤에야 허름한 보퉁이 하나를 두고 내린 것이 눈에 띄었다. 만져 보니 먹는 것이 아닌 것 같아 적이 실망스러웠으나, 무슨 책인지는 몰라도 책은 분명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창 따분하던 판에 돼도 잘됐다 싶어서 보자기를 끌러 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책은 책인데 두 권이었고, 그것도 다 른 책이 아니라 하나는 서울에 있을 때 길바닥에 흔히 널려 있던 당사주책이요, 그보다 약간 얇은 것은 사주책에 부속 처럼 따라다니는 천세력(千歲曆)이었다. 당사주책을 떠들어 보니 국문 해득자면 누구나 육갑을 짚을 수 있게 사주 풀이하는 방법부터 자세히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지루함을 잊어 보려고 사주책을 붙들었다. 과연 기차가 천안에서 근 한 시간이나 충그리고, 조치원 에서 해찰부리고, 대전에서 늘어지고 하는데도 지루한 줄을 몰랐다. 아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기저기서 너도나 도 하고 저마다 생년월일시를 주워섬기며 줄을 섰기 때문이었다. 천세력까지 곁들여 있으니 일진 월건 태세를 셈하느 라고 왼손가락을 자주 짚어 댈 필요도 없었다.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벋나가기 시작하니 입인들 점잔을 빼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물어 보는 사람마다 늙고 젊고 없이 말머리는 존대말로 꺼냈어도 말꼬리는 일부러 반말지거리로 흐렸다. 엉터리가 아니란 것을 강조하는 방법은 그 수밖에 없었으니까.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듯이, 수(數)를 보는 술객(術客)은 괘사(卦辭)보다 술수(術數)였고, 술수보다는 말수가 많고 걸찍 해야 물어 본 사람도 듣기가 괜찮은 법이었으니, 그는 기찻간에서부터 그 수를 일찌감치 터득한 셈이었다. 게다가 ‘가 정 비서’를 하면서 정치 식객들과 노닥거리는 동안에 들은 것이라곤 거의 허랑하고 부황한 소리들뿐이어서, 그것을 이 리 갖다 붙이고 저리 갖다 붙이고 하니 금상첨화일밖에. “이번엔 뭐 보는 사람도 하나 들어왔다며?” 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들리는 소리가 그 소리였다. 소문이 한 발짝 앞서서 입소를 한 거였다. 그에게는 신수 대통 을 뜻하는 희소식이었다. 다른 입소자들은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얼먹어서 갈팡질팡 난리였으나, 그는 득의만면하여 느직하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그날부터 훈련에 정신없는 신병으로서 바쁜 것이 아니라, 팔자에 없는 동양철학자로 인정받아 높은 사람들 앞 에서 동양 철학을 강의하기에 바빴다.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얼마 아니 된 때여서 장교들은 말할 나위 없고, 장교가 될 가망성이 없는 직업군인들까지도 심리적인 불안감에 안절부절을 못하던 상황이었음은, 그들이 물어 보는 부분만 가지 고도 쉽게 미루어 볼 수가 있었다. 중학교에서 단짝까지는 안 갔어도 곧잘 어울려 놀았던 친구 중에 최 모가 있었다. 최는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제때에 입영을 했던 관계로 그 무렵에는 이미 훈련소의 조교가 되어 있었다. 최는 제대하며 일변 복학을 하면 그만이었으니 따로 물어 볼 것이 없었으나, 소문이 하도 요란하여 에멜무지로 구경 이나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서 남의 뒤를 따라나서게 되었다. 가서 보니 유자였다. 최는 깜짝 놀랐다. 최는 친구가 신병 생활을 수월히 하는 것이 반가운 한편으로, 결국 언젠가는 들통이 나도 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 불안해서 못 볼 지경이었다. 또 그게 아닌 친구가 겁 없이 벌이는 사기 행각을 모 르쇠하고만 있는다는 것도 친구 된 도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의 본색을 사실대로 밝힐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때가 늦은 것이었다. 최는 고심 끝에 한 가지 방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가 훈련병들의 조교에 머물지 않고 친구의 조수도 겸하는 방법이었다. 그로부터 유자는 높은 사람이 찾을 때마다 조수에게 먼저 달려가서 예비 지식을 단단히 쌓은 연후에야 술수에 임하 게 되었다. 누구는 부인이 하던 얼마짜리 계가 언제 깨졌고, 누구는 난봉이 나서 논산 읍내에 작은집을 차렸고, 누구는 뒷배를 보아 주던 별이 반혁명세력으로 몰려 군법 재판에 넘어갔고…… 최는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다른 조교들 에게 알아 들이고 하여, 밑천이 달리지 않게끔 조수 노릇 한번 착실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자는 조수에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힘 하나 안 들이고 강의를 계속할 수가 있었다. 뇌물을 밝힌다는 사람에겐 구설수를 예고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있는 사람에겐 따뜻한 위로를 하였고, 두 집 살림에 시달리거나 좋아 지내는 여자 로 하여 속을 끓이는 사람에겐 여난을 경고하였다. “역시 용한데, 쪽집게 같어…….” 물어 보는 사람마다 백발백중이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별명은 쪽집게가 아니라 도사였다. 유 도사였다. 입소 동기생들이 땡볕에서 낮은 포복이다, 높은 포복이다 하고 군살을 빼는 동안, 그는 도사답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군살이 찔 것 같은 그늘에 앉아서 졸(卒)을 함부로 죽여 가며 초한전(楚漢戰)으로 실전 훈련을 쌓았고, 궁이 면줄 에 몰릴 지경으로 다 된 판을 붙들고 늘어져 빗장을 부르는 흘떼기장기와, 보리바둑 주제에 반집짜리 끝내기 패로 시 간을 끌면서, 남들이 다들 어려워 어려워했던 신병 시절을 유감없이 마쳤다. 병과는 그쪽이 편할 듯해서 헌병을 택하 고, 기회가 없어서 못 배웠던 자동차 운전도 도사 시절에 익혔다. 도사라는 애칭은 평생을 두고 따라다녔다. 직업의식이 철저하여 맺고 끊는 맛이 분명한데다, 기술이건 지식이건 그 것이 직업과 관련이 있는 것은 완벽에 가깝도록 익히고 펼치고 했던 특유의 장인기질에 따른 것이었다. 자동차 운전만 해도 그러하였다. 운전 기술은 ‘군대 운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는 그것으로써 평생을 경영하였다. 그는 제대 후에 한내에서 한동안 택시를 몰았으나, 한내도 보령도 그가 기량을 펴기에는 바닥이 너무 좁았다. 그는 서울로 옮겼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내의 10대 재벌 그룹에 드는 재벌 그룹 총수의 승용 차 운전대였다. 그룹의 총수도 본래는 차량 운전으로 시작하여 운수 업체를 일으켰고, 운수 업체를 주력 기업으로 하여 그룹을 이룩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웬만한 운전 기술로는 그 앞에서 땅띔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총수는 그러나 유자 의 운전 기술 내지 장인 기질 앞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1970년, 내가 지금의 세종 문화 회관 자리에 있던 예총 회관의 문인 협회 사무실에서 협회 기관지를 편집하고 있을 어름이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유자가 불쑥 찾아왔다. 10년도 넘어 된 해후였다. 이산(怡山)의 시처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했더니, 그는 재벌 그룹 총수의 승용차 운전수가 되고, 나는 글이라고 끄적거려 봤자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가 없는 무명작가가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잡지를 보다가 우연히 나를 알아보고, 그 잡지사에 전화로 내 소재를 찾는 번거로운 절차를 무릅쓰고 찾아온 데에는 그 나름의 속셈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대학교수의 부인이 된 자기 누이동생을 내게 중매해 봤 으면 하고 찾아본 것이었다. 아니, 결혼을 하면 처자를 굶길 놈인지 먹일 놈인지 우선 그것부터 슬쩍 엿보려고 온 것이 었다. 그는 해가 바뀌어 그 누이동생을 여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말을 내게 하였다. 그는 처음 만났던 날 저녁에 내가 말술을 마시고도 양에 안 차 하는 데에 질려서 대번에 가위표를 쳐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다 본 책이 있으면 달라고 하여 번역판 “사기(史記)”를 한 질 주었더니, 그 후부터는 올 때마다 책 탐을 드러 내는 것이었다. 잡지사 편집실에는 사시장철 기증본으로 들어오는 책만 해도 이루 주체를 못 하도록 더미로 답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는 오는 족족 자기 욕심껏 그 책 더미를 헐어 갔다. 장근 17년 동안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그의 열정적인 독서 생활이야말로 실은 그렇게 출발한 것이었다. 또 책 때문에 오는 것만도 아니었다. 직장에서 답답한 일이 있으면 터놓고 하소연할 만한 상대로서 나를 택했던 것 도 비일비재의 경우에 속하였다. 하루는 어디로 어디로 해서 어디로 좀 와 보라고 하기에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귀꿈맞게도 붕어니 메기니 하고 민물 고기로만 술상을 보는 후미진 대폿집이었다. 나는 한내를 떠난 이래 처음 대하는 민물고기 요리여서 새삼스럽게도 해감내가 역하고 싫었으나, 그는 흙탕 내도 아 니고 시궁 내도 아닌 그 해감내가 문득 그리워져서 부득이 그 집으로 불러냈다는 것이었다. “허울 좋은 하눌타리지, 수챗구녕 내가 나서 워디 먹겄나, 이까짓 냄새가 뭣이 그리워서 이걸 다 돈 주고 사 먹어. 나 원 참, 취미두 별 움둑가지 같은 취미가 다 있구먼.” 내가 사뭇 마뜩잖아했더니, “그래두 좀 구적구적헌 디서 사는 고기가 하꾸라이버덤은 맛이 낫어.” 하면서 그날사 말고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자기주장에 완강할 때는 반드시 경험론적인 설득 논 리로써 무장이 되어 있는 경우였다. “무슨 얘기가 있는 모양이구먼.” “있다면 있구 웂다면 웂는디, 들어 볼라남?” 그는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총수의 자택에 연못이 생긴 것은 그 며칠 전의 일이었다. 뜰 안에다 벽이고 바닥이고 시멘트를 들이부어 만들었으니 연못이라기보다는 수족관이라고 하는 편이 알맞은 시설이었다. 시멘트가 굳어지자 물을 채우고 울긋불긋한 비단잉어들 을 풀어 놓았다. 비단잉어들은 화려하고 귀티나는 맵시로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으나, 그는 처음부터 흘기눈을 떴다. 비행기를 타고 온 수입 고기라서가 아니었다. 그 회사 직원의 몇 사람 치 월급을 합쳐도 못 미치는 상식 밖의 몸값 때 문이었다. “대관절 월매짜리 고기간디 그려?” 내가 물어보았다. “마리당 팔십만 원씩 주구 가져왔댜.” 그 회사 직원들의 봉급 수준을 모르기에 내 월급으로 계산을 해 보니, 자그마치 3년 4개월 동안이나 봉투째로 쌓아 야 겨우 한 마리 만져 볼까 말까 한 값이었다. “웬 늠으 잉어가 사람버덤 비싸다나?” 내가 기가 막혀 두런거렸더니, “보통 것은 아닐러먼그려. 뱉어낸메네또라나 뭬라나를 틀어 주면 그 가락대루 따러서 허구, 차에코풀구싶어라나 뭬라 나를 틀어 주면 또 그 가락대루 따러서 허구, 좌우간 곡을 틀어 주는 대루 못 추는 춤이 웂는 순전 딴따라 고기닝 께. 물고기두 꼬랑지 흔들어서 먹구 사는 물고기가 있다는 건 이번에 그 집에서 츰 봤구먼.” 그런데 이 비단잉어들이 어제 새벽에 떼죽음을 한 거였다. 자고 일어나 보니 죄다 허옇게 뒤집어진 채로 떠 있는 것 이었다. 총수가 실내화를 꿴 발로 뛰어나왔지만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한동안 넋 나간 듯이 서 있던 총수가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유자를 겨냥하며 물은 말이었다. “글쎄유, 아마 밤새에 고뿔이 들었던 개비네유.” 유자는 부러 딴청을 하였다. “뭐야? 물고기가 물에서 감기 들어 죽는 물고기두 봤어?” 총수는 그가 마치 혐의자나 되는 것처럼 화풀이를 하려 드는 것이었다. 그는 비위가 상해서 “그야 팔자가 사나서 이런 후진국에 시집와 살라니께 여라 가지루다 객고(客苦)가 쌯여서 조시두 안 좋았을 테 구…… 그런디다가 부룻쓰구 지루박이구 가락을 트는 대루 디립다 춰 댔으니께 과로해서 몸살끼두 다소 있었을 테 구…… 본래 받들어서 키우는 새끼덜일수록이 다다 탈이 많은 법이니께…….” 그는 시멘트의 독성을 충분히 우려내지 않고 고기를 넣은 것이 탈이었으려니 하면서도 부러 배참으로 의뭉을 떨었다. “하는 말마다 저 말 같잖은 소리…… 시끄러 이 사람아.” 총수는 말 가운데 어디가 어떻게 듣기 싫었는지 자기 성질을 못 이기며 돌아섰다. 그는 총수가 그랬다고 속상해할 만큼 속이 옹색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에 들은 말만은 쉽사리 삭일 수가 없었다. 총수는 오늘도 연못이 텅 빈 것이 못내 아쉬운지 식전마다 하던 정원 산책도 그만두고 연못가로만 맴돌더니, “유 기사, 어제 그 고기들은 다 어떡했나?” 또 그를 지명하며 묻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한 마리가 황소 너댓 마리 값이나 나간다는디, 아까워서 그냥 내뻔지기두 거시기허구, 비싼 고기는 맛두 괜찮겄다 싶기두 허구…… 게 비눌을 대강 긁어서 된장끼 좀 허구, 꼬치장두 좀 풀구, 마늘두 서너 통 다져 늫구, 멀국두 좀 있게 지져서 한 고뿌덜씩 했지유.” “뭣이 어쩌구 어째?” “왜유?” “왜애유? 이런 잔인무도한 것들 같으니…….” 총수는 분기탱천(憤氣撐天)하여 부쩌지를 못하였다. 보아하니 아는 문자는 다 동원하여 호통을 쳤으면 하나 혈압을 생각하여 참는 눈치였다. “달리 처리헐 방법두 웂잖은감유.” 총수의 성깔을 덧들이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그 방법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뒷동을 달 은 거였다. 총수는 우악스럽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아랫것들하고 따따부따해 봤자 공연히 위신이나 흠이 가고 득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숨결이 웬만큼 고루 잡힌 어조로, “그 불쌍한 것들을 저쪽 잔디밭에다 고이 묻어 주지 않고, 그래 그걸 술안주해서 처먹어 버려? 에이…… 에이…… 피두 눈물두 없는 독종들…….”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 지져 먹어 보니 맛이 워떻타?” 내가 물은 말이었다. “워떻기는 뭬가 워뗘…… 살이라구 허벅허벅헌 것이, 별맛도 웂더구만그려.” 하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독종이면 저는 말종인디…… 좌우지간 맛대가리 웂는 서양 물고기 한 사발에 국산 욕을 두 사발이나 먹구 났 더니, 지금지금허구 해감내가 나더래두 이런 붕어 지지미 생각이 절루 나길래 예까장 나오라구 했던겨.” 총수는 그 뒤로 그를 비롯하여 비단잉어를 나눠 먹었음 직한 대문 경비원이며, 보일러실 화부며, 자녀들 등·하교용 승용차 운전수며, 자택에서 근무하는 종업원들에게는 조석으로 눈을 흘기면서도, 비단잉어 회식 사건을 빌미로 인사이 동을 단행할 의향까지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하루바삐 총수의 승용차 운전석을 떠나고 싶었다. 남들은 그룹 소속 운전수들의 정상(頂上)이나 다름없는 그 자 리에 서로 못 앉아서 턱주가리가 떨어지게 올려다보고들 있었지만, 그는 총수가 틀거지만 그럴듯한 보잘것없는 위선자 로 비치기 시작하자, 그동안 그런 줄도 모르고 주야로 모셔 온 나날들이 그렇게 욕스러울 수가 없었고, 그런 위선자에 게 이렇듯 매인 몸으로 살 수밖에 없는 구차스러운 삶이 칙살맞고 가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총수가 더 붙들어 두고 싶어도 불쾌하고 괘씸해서 갈아치울 수밖에 없는 어떤 사단이나 한바탕 퉁그러지기만 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단은 생각보다 이르게, 그리고 싱겁게 다가왔다. 그는 그 비단잉어 회식 사건이 있고 두어 달 만에 나타났는데, 그날이 바로 그가 그 동안 벼르고 별러 온 그 그룹 소속 운전수들의 정상으로부터 하야를 한 날이었다. 사단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총수는 본디 각근하고 신실한 불교 신자였다. 총수의 원당(願堂)만 해도 어디라고 하면 아이들도 이내 짐작할 수 있 는 국립 공원 안의 명찰이거니와, 언필칭 민족 문화 유산 운운하지만 실은 총수의 사찰(私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물심양면으로 해온 것이 있었기에 그리 된 것이라고 보면, 총수의 신심이 어떠한가를 능히 헤아 릴 수 있는 일이었다. 총수는 자택에도 불당을 두고 있었다. 자택의 불당은 저만치 떨어진 후원에 있었다. 정원이 웬만한 국민학교의 운동 장보다도 너른데다 잘 가꾼 정원수가 가득하여 살림집인 본채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외진 곳이기도 하였다. 불당은 여느 암자들처럼 불단에 황금색의 등신불을 모시고 있었으나, 불상 주변에는 정화수를 올리는 불기와 향완이 하나씩, 그리고 양쪽에 풍물의 한 가지인 날라리를 거꾸로 세운 듯한 촛대뿐으로, 재벌가의 불당치고는 썩 정갈하고 소 박한 편이라고 할 만하였다. 그런 반면에 총수는 불상이나 불단에 먼지 하나라도 앉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청소 한 가지는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도록 엄히 다루고 있었다. 이 불당의 청소를 맡고 있던 것이 유자였다. 총수를 출근시키기 전에는 손이 놀고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총수를 모시고 국립 공원에 있는 원당을 자주 왕래하여, 절에서 하는 불교 의식이나 풍속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익숙했던 것이 청소를 맡게 된 이유였다. 총수는 어슴새벽에 일어나면서 일변 불당에 참배를 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유자는 총수가 참배 오기 전에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며 불두에서 결가부좌까지 융으로 만든 마른행주로 불상의 먼지 를 거두었고, 불단을 훔치고 촛불을 써놓은 다음 전날 제주도에서 공수해 온 약수로 정화수를 갈아 올리는 것이 일과 의 시작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불상의 먼지를 찍어 내려오던 그의 손이 항마촉지(降魔觸地)한 손등에 이르렀는데, 파리똥인지 뭔지 마른행주로는 냉 큼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행주에 물을 축여 오려면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까지 다녀와야 할 텐데, 그렇게 지체하다가는 십중팔구 총수가 나타나기 전에 청소를 마치지 못하기가 쉬웠다. 불단의 정화수를 쓸 수도 없었다. 묵은 정화수는 총수 부인이 손수 식 구대로 컵에 나누어 온 가족이 음복하듯이 마시게 하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축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가 차량을 다루던 버릇으로 자기도 모르게 툽 하고 마른행주에 침을 뱉어서 막 파리똥을 지우려던 순간이었다. “야야, 저런 천하에 몹쓸…….” 돌아다볼 것도 없이 총수의 호통이었다. 총수가 소리 없이 나타나서 청소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총수의 호령이 이어지고 있었다. “너 너…… 너 오늘부터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총수가 큰 절마다 정문의 문간에 좌우로 험악하게 서 있는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눈을 해가지고 명령하면서도 ‘내 회 사’가 아니라 ‘내 집’에서 나가라고 한 것은, 거듭 생각해 보아도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굽어 살피심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지없이 그날로 좌천되었다. 좌천지는 그룹에 속한 모든 차량의 교통사고를 처리하는 부서였고, 관할 구역은 특별시 전역이었다. 이른바 노선 상무(路線常務)가 된 것이었다. 노선 상무는 또 노상(路上) 상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풍찬노숙 한 가지는 제도적으로 보장이 된 자리였다. 남들은 관례로 보아서 그도 당연히 사표를 던지려니 하고 있었다. 업무의 내용이며, 업무의 난이도(難易度)며, 조직 에서의 위상이며가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리로 벌어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표를 내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새로운 업무를 캐고 익히고 있었다. 그가 그러고 있으니 남들은 창자도 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를 쳐다보는 연민어린 눈길이 그것이었다. 그는 비록 총수의 측근에서 그야말로 하루 식전에 원악도(遠惡島)와 다름없는 말단 부서의 현장 실무자로 유배된 셈 이었지만, 공사석을 막론하고 한마디의 불평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적어도 위선자의 몸을 모시고 다니는 것보다는 떳 떳하며, 아울러서 속도 그만큼 편할 터이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새로 맡은 자리가 험악한 자리임을 설명하기에는 실로 긴 말이 필요치 않았다. 노선 상무에게는 차량의 운행 노선이 여러 갈래인 만큼이나 거래처가 많았다. 대강만 꼽아 보더라도 우선 사고 현장 에 뛰어온 교통순경을 첫 거래처로 하여, 경찰서와 검찰청과 법원이 있고, 변호사가 있었다. 노선을 달리하여 병원의 응급실이 있고, 입원실이 있고, 원무실이 있고, 또한 보험 회사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노선에는 병원의 영안실과 장의사와 공원묘지와 화장터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기관보다도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것은 피해자 측에서 선임한 변호 사가 아니라 피해 당사자 내지는 그 유가족들이었다. 노선 상무의 업무는 사고 차량이 속한 단위 회사 사장 및 그룹의 총수를 대리하여, 교통사고로 빚어진 모든 복잡하 고 사나운 일에 사무적으로, 법률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나아가서 인간적으로 임하는 일이요, 헌신적으로 뒤 치다꺼리를 하는 일이요, 후유증이 일지 않도록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복잡하고 사나운 일’의 처리는 앞에 말한 여러 갈래 노선의 거래처를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 적으로, 법률적으로, 경제적으로, 현실적으로, 인간적으로 일단은 이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나 모든 거래처와 그렇게 겨루어서 이기더라도 이긴 것 자체에만 뜻이 있어 하고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기되 양심적으로 이겨야 하고 정서적으로도 이겨야만 하였다. 그가 인간적으로, 양심적으로, 정서적으로 이기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필귀정의 원칙과 진실에 대한 신뢰에 흔들림이 없는 이상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양심과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거래처의 인성(人性)을 짝으로 삼아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가해자(총수 혹은 그룹의 동료 운전수)에게나 피해자에게나 부정한 승리, 부당한 패배가 있을 수 없도록 하는 일 이 자신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스스로 다짐하기를 변함없이 하고 있었다. 그러한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수고와 오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사고 현장에 나가서 원인 유발의 동기와 환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정직한 실험과 논리의 개발에 부지런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 까닭에 법의학에 대하여, 인체 생리학에 대하여, 정신 신경과에 대하여, 심리학에 대하 여, 보험법에 대하여, 도로 교통법에 대하여, 도로 관리법이니, 교통 관리법이니 무슨 시행령이니, 무슨 지침이니 조례 니 하는 것들에 대하여, 무엇 한 가지도 설익거나 어설프거나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는 남다른 노력으로 그것을 극복하였다. 아니 통달하였다. 도사였다. 그는 소설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이 만년 수리 문맹(數理文盲)인 나에게 호프만식 계산법을 비롯하여 보험금 계산 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실무 경험과 선례, 판례, 사례를 들어 가며 사건별로 누누이 강의를 되풀이하였으나, 일개 백 면서생에 불과한 나에게는 이렇다 할 도움이 된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가 줄줄 외워 대는 법령이나 조문 해석이 하도 복잡하여, 대개는 듣는 도중에 앞에서 말한 것들을 말해 준 순서대로 잊어 가다가, 그가 결론에 다다른 연후에야 겨우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는 말꼬리 부분에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보기보다는 훨씬 악바리란 사실만을 번번이 재확인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는 깎아서 말하자면 보기 드문 악바리였다. 하지만 가해자나 피해자 편으로는 오히려 인간미가 넘치는 든든한 해 결사였고, 그를 세상에서 다시없는 악바리로 치부함직한 곳은 오직 한 군데, 즉 자동차 보험 회사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피해자나 피해 가족에게 공정한 보상이 되도록 애쓰면서도, 가령 사건 브로커 따위가 뛰어들어 총수의 사회적 인 위치를 기화로 사망자의 장례를 거부하고 버티거나, 시체를 볼모 잡아 시위하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경우에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그런 경우에도 물론 법에 묻기 전에 설득을 먼저 하였다. “이봐요, 돌아가신 양반이 돈 타먹으려고 돌아가신 건 아니잖소. 시신두 부르는 게 값인 중 아슈? 물건이던감? 시방 무슨 흥정을 허구 있는겨. 여기 식인종 웂어, 산사람은 월급이나 품삯이 챘다(올랐다) 하렸다(내렸다) 허니께 혹 상품 이 될는지 몰라두 시신은 상품이 아닌규.” 그런 와중에도 피해 가족의 대개는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 그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예사였다. 환자에 대한 잦은 문병과 신속한 치료조치, 사망자가 난 사건에는 넉넉한 부의와 정중한 조문, 장지까지 따라가서 장례를 거드는 보기 드 문 성의와 적극적인 보상 절차 이행, 그리고 한 푼이라도 더 보태어 주려고 보험 회사와 밀고 당기는 지능 대결 등을 통하여 그의 진면목을 발견한 사람은, 비록 악연으로 만난 사이일망정 그 나름의 감동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건을 끝내면서 그들에게 진심어린 치하와 더불어 따끈한 차라도 한잔 대접받게 되면, 그는 그 일로 인하 여 누적된 피로가 씻은 듯이 가시면서 자신의 소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보람마저 느끼는 것이었다. 뒷맛이 씁쓸했던 일도 없지는 않았다. 사망자가 생전에 변변치 못했던가 싶은 사례가 그러하였다. 사고 발생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뒤엉켜서 본의 아니게 해결이 지연되는 사건도 적지 않았다. 사건을 들고 법정으로 가거나, 보험 회사에서 제기한 이의에 분쟁의 소지가 있어도 자연히 시일을 끌었다. 사망자의 부인이 젊으면 더욱 그러하였다. 부인의 뒤에 친정 오라비를 자처하는 자가 따라다니면서, 부인에게 잘 보 이려고 생색이 날 일을 찾게 되면 열에 일고여덟이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그런 친정 오라비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사망자의 사십구재 이전부터 모습을 나타내는 친정 오 라비는, 사망자가 살아 있어서부터 그녀와 서로 네 거니 내 거니 해온 사이였고, 사십구재라도 지나가고 나서 끌고 다 니는 친정 오라비는, 유흥가에서 만난 직업적인 제비족이 분명하였다. 그는 사건 처리를 하면서도, 신통찮던 남편에게서 속 시원히 해방되고, 예정에 없었던 목돈을 쥐게 되고, 사내를 새 로 만나서 딴 세상이 있었음을 발견한 젊은 과부의 그 의기양양한 모습을 볼 때처럼 맥살이 풀리고 마음이 언짢을 때 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럴수록이 공사 간을 분명히 하여 일을 매듭지었다. 그런데 그런 여자일수록 사건이 해결된 뒤 그에 대한 사의 표시가 차 한 잔 정도로는 크게 결례라고 생각하는 축이 많은 편이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몸으로 때우겠다는 거였다. 그에게는 정해진 대답이 있었다. “드으런년.” 그렇게 한 마디로 자리를 박차 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은 비단 피해자 쪽의 사정만도 아니었다. 사고를 낸 운전수가 당황하여 숨어 버리거나 구속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안됐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는 운전자의 운전 윤리에 누구보다도 반듯하였다. 그러므로 운행 중에 때아닌 곳에서 과속으로 앞지르기를 하거나, 옆에서 끼여들어 진로 방해를 하거나, 차선을 함부로 넘나들거나, 신호등이 바뀌기 전부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뒤에 서 경적을 울려 대거나, 운전상식이나 도로질서에 도전하는 자를 보면, 매양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기를 잊지 않았다. “츤헌늠…… 저건 아마 즤 증조 할애비는 상전덜 뫼시구 가마꾼 노릇 허구, 할애비는 고등계 형사 뫼시는 인력거꾼 노릇 허구, 애비는 양조장 허는 자유당 의원 밑에서 막걸리 자즌거나 끌었던 집안 자식일겨. 질바닥서 까부는 것덜 두 다 계통이 있는 법이니께.” 그가 다루는 사건도 태반이 가해자의 운전 윤리 마비증이 자아낸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해자가 그룹 내의 동료 운전 수라 하여 팔이 들이굽는다는 식의 적당주의를 취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사건 처리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기 위해 신상 기록 대장에 있는 주소를 찾아가 보면 일쑤 비탈진 산꼭대기를 더뎅이 진 무허가 주택에서 근근이 셋방살이를 하는 축이 많았고, 더욱이 인건비를 줄이느라고 임시로 쓰던 스페어 운 전수들이 사는 꼴이 말이 아닐 때는, 그 운전자의 자질 여부를 떠나서 현실적인 딱한 사정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가 없 었던 것이다. 스페어 운전수는 대체로 벌이가 시답지 않아 결혼도 못 한 채 늙고 병든 홀어미와 단칸 셋방을 살고 있거나, 여편네 가 집을 나가 버려 어린것들만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들여다보면 방구석에 먹던 봉짓쌀이 남은 대신 연탄이 떨어 지고, 연탄이 있으면 쌀이 없거나 밀가루 포대가 비어 있어, 한심해서 들여다볼 수가 없고 심란해서 돌아설 수가 없는 집이 허다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주머니를 털었다. 스페어 운전수의 사고에는 업무 추진비 명색도 차례가 가지 않아 자신의 용돈을 털게 되는 것이었다. 식구가 단출하면 쌀을 한 말 팔아 주고, 식구가 많은 집은 밀가루를 두 포대 팔아 주고, 그리고 연탄을 백 장씩 들여놓아 주는 것이 그가 용돈에서 여툴 수 있는 한계였다. 그는 쌀가게에서 쌀이나 밀가루를 배달하고, 연탄 가게에서 연탄 백 장을 지게로 져올려 비에 안 젖게 쌓아 주기를 마칠 때까지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을 나와서 골목을 빠져나오다 보면 늘 무엇인가를 빠뜨리고 오는 것 처럼 개운치가 않았다. 그는 비탈길을 다 내려와서야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곤 하였다. 산동네 초입의 반찬 가게를 보고서야 아까 그 집의 부엌에 간장밖에 없었던 것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면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반찬 가게에서 집어 드는 것은 만날 얼간하여 엮어 놓은 새끼 굴비 두름이었다. 바다와 연하여 사는 탓에 밥상 에 비린 것이 없으면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아 하는 대천 사람의 속성이 그런 데서까지도 드티었던 것이다. 도로 산비탈을 기어올라가서 굴비 두름을 개 안 닿게 고양이 안 닿게 야무지게 매달아 주면서, “붝에 제우 지랑밲이 웂으니 뱁이구 수제비구 건건이가 있으야 넘어가지유. 탄불에 궈자시던지 뱁솥에 쩌자시던지 하면, 생긴 건 오죽잖어두 뇌인네 입맛에 그냥저냥 자셔 볼 만헐규.” 쌀이나 연탄을 들여 줄 때는 회사에서 으레 그렇게 돌봐 주는 것이거니 하고 멀건 눈으로 쳐다만 보던 노파도, 그렇 게 반찬거리까지 챙겨 주는 자상함에는 그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가 노선 상무로 나간 초기에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속절없이 봉변을 당하기에 바빴다. 사망자가 난 사고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운전수가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거나 아예 달아나 버려서 분풀이를 하 고 싶어도 상대가 없어서 앙앙불락하던 차에, 사고를 낸 회사에서 사고처리반이 나왔다고 하면 대개는 옳거니, 때맞추 어 잘 만났다 하고 떼거리로 달려들어 덮어놓고 멱살을 잡으며 주먹부터 휘두르고 보는 것이 예사였다. 나중에는 사람 을 잘못 알고 실수했노라고 사과하고, 일을 처리하는데도 싹싹하고 상냥하게 협조하는 위인일수록 처음에는 흥분을 가 누지 못해 사납게 부르대고 날뛰는 편이었다. “야, 너, 흥부는 놀부같이 잘사는 형이라도 있어서 매품을 팔고 살었다지만, 너는 뭐냐, 뭐여, 못사는 운전수를 동료 라구 둔 값에 매품이나 팔며 살거라, 그거여? 너야말루 군사정변이 나서 구정권의 거물 비서 자격으루 끌려가서두 볼텡이 한 대 안 줘백히고 니 발루 걸어나온 물건인디 말여, 그런디 이제 와서 냄의 영안실이나 찌웃그리메 장삼이 사헌티 놈짜 소리 듣는 것두 과만해서 주먹질에 자빠지구 발길질에 엎어지구 허니, 니가 그러구 댕긴다구 상무 전무 가 아까징끼값을 물어 주데, 사장 회장이 떨어져 밟힌 단추값을 보태 주데? 사대부 가문을 자랑허시던 할아버지가 너버러 이냥 냄의 아랫도리루만 돌며 살라구 가르치셨네, 동경유학 출신의 아버지가 동넷북으로 공매나 맞구 살라구 널 나놓셨네? 너두 처자가 있는 묌이 이게 뭐라네? 뭐여? 니 신세두 참…….” 그는 봉변을 당하고 나면 자기를 저만치 떼어놓고 바라보며 그런 허희탄식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세상사란 대저 궁즉통인지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나운 일은 그저 예방이 제일이었다. 그가 찾아낸 예방책은 그가 먼저 선수를 쳐서 저쪽의 예봉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실천을 하였다. 사망자의 빈소가 있는 병원의 영안실에 가면 처음부터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빈소의 형식이 불교색인지 기독 교색인지도 살피지 않았다. 우선 고인의 영정에 절부터 재래종으로 하고 꿇어앉아, 손수건으로 눈자위를 눌러 가며 눈 시울을 훔쳤다. 눈물 같은 건 비칠 생각도 않던 눈도 그렇게 거듭 귀찮게 하면 진짜로 눈물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가 쉬웠다. 또 그렇게 흉물을 떨며 눌러 있으면 상가의 친인척 중에서 나잇살이나 된 사람이 다가와 어깨를 다정히 흔들 며 달래기도 했다. 일은 어차피 당한 일인데 애통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저리 가서 술 이나 한잔 하라는 것이었다. “에이 쥑일늠덜…… 암만 운전질이나 해처먹구 사는 막된 것덜이래두 그렇지, 워쩌자구 이런 짓을 허는겨, 이에 쥑 일늠덜…….” 천연스럽게 운전수를 나무라며 두툼하게 장만해 간 부의를 하고 물러나면, 아까 어깨를 흔들어 달래던 사람이 술상 으로 안내를 하였고, 또 대개는 그 사람이 마주 앉아 술을 권하는 것이었다. 서로 잔을 건네고 담뱃불을 나누고 하면서 서너 순배쯤 하고 나면 궁금한 쪽은 그쪽이라, “실롑니다만, 망인하고는 어떻게 되시는지…….” 하고 신분을 묻는 것이었다. 그는 그제서야 앉음새를 고치면서 정중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이왕에 손님 대접으로 술까지 권커니잣거니 해온 사이인데 새삼스럽게 술상을 걷어차며 대거리를 하려 든다면 이미 경위가 아닌 거였다. 비록 성질이 불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때를 놓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사고 처리반이 나왔다는 말에 가만두지 않을 작정으로 눈을 홉뜨며 다가오는 이가 있으면, 중간에 서서 볼썽사나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책임 의식이 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그가 빈소에서 물리적인 대우를 면 치 못했던 것은 노선 상무 초기의 얼마 동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빈소에 드나들다 보면 망자의 가족 가운데 담이 들거나 풍기가 있어서 몸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 노인이 많았다. 그런 사람을 보아주려고 침놓는 법을 배웠다. 그는 돌팔이 침쟁이였지만 침통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장지에 따라다니다 보니 묏자리가 좋으니 나쁘니 하고 상제나 친척들 간에 불퉁거리고, 좌향이 옳으니 그르니 하고 공원묘지 산역꾼들과 불화하여 장례를 정중하게 못 하는 집도 많았다. 그래서 그럴 때 쓰려고 책을 구해 들여 풍수지 리를 배우고 쇠(나침반)를 장만하여 좌향을 정해 주기도 하였다. 그럴 때는 훈련소 신병 시절에 써먹었던 입담도 한몫 거들었다. 풍수를 배우는 과정에서 지하의 수맥에 대한 이치도 배워 둘 필요가 있었다. 상도동 성당인지 노량진 성당인지 버드 나뭇가지로 수맥을 짚는 데에 권위인 신부님을 찾아다니며 수맥을 배우고, 그러는 동안에 천주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그의 총수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부리는 꾀가 있었다. 총수는 유자의 능력을 높이 사서 곧 과장으로 올려 주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승진은 불허하였다. 유자는 10년이 가도 과장이었다. 그가 자리를 옮기면 누가 그 자리에 가더라도 그만한 능력을 보이지 못하리라는 것 을 총수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자는 총수에게 자신의 상한선이 과장으로 굳어진 이유를 물었다. 총수는 오로지 신원 조회 탓이라고 말했다. 유자는 구태여 운수 회사에서까지 연좌제를 받드는 까닭에 대하여 구구하게 묻지 않았다. 항공 사업도 겸하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유자는 총수를 원망하지 않았다. 선거 때마다 연좌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가 정권이 보장되면 언제 그랬느냐 해온 정권 담당자에 대해서도 원망 하지 않았다. 연좌제에 관해서도 불원천불우인(不怨天不尤人)의 자세가 기본이었다. 하물며 소신껏 살다가 일찍이 처형당한 부친을 원망할 터이겠는가. 그는 부친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지방을 썼다. 그러나 현고학생운운 하는 통속적인 지방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반드시 이렇게 썼다. 현고 남조선 노동당 홍성군 당위원장 신위. 일가의 아낙 한 사람이 제삿날 일을 거들어 주러 왔다가 그 지방을 보고 물었다. “얼라, 워째 이 댁 지방은 저냥 질대유?” “예, 약간 길게 되여 있슈.” 유자는 그러면서 비시시 웃었다. 고독한 웃음이었다. 그는 고독하고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술과 독서와 그리고 남에 대한 봉사의 즐거움으로써 시름을 잊고 애달픔을 삭였다. 문인들과의 폭넓은 교유도 일말의 위안이 됐을는지 몰랐다. 그가 사랑하는 문인, 그를 사랑하는 문인이 많았다. 자주 어울렸던 문인으로 이호철, 고은, 천승세, 신경림, 박용수, 염재만, 김주영 제씨는 그가 성님으로 모신 문인이었다. 동년배인 한승원, 손춘익, 조태일, 안석강, 박태순, 양성우 제 씨는 친구로서 지낸 문인이었고, 강순식, 송기원, 이시영, 이진행, 채광석, 김성동, 임재걸, 정규화, 홍일선, 김사인 제 씨는 그가 아우님으로 부르던 문인이었다. 김지하 씨가 오랜만에 출옥해 있을 때는 원주까지 찾아가서 보았고, 김성동 씨는 고향후배라 하여 항상 애틋한 눈길을 주었다. 원로 작가 유승규, 천승세 씨가 교통사고를 입으니 자기 일처럼 뛰어다니고, 우리 집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도 그가 해결사 노릇을 해주었다. 어디를 가나 교통순경이 먼저 경례를 붙이고, 경찰서마다 말이 통하는 이가 있어서 즉결 재판감을 훈방으로 깎는 데 에도 그가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병원을 가더라도 너나들이를 하고 지내는 의사가 있고 원무실장이 있었다. 그로 인하여 여러 문인이 의료 혜택을 입었으니, 그가 입원한 인사를 한 번 위문하고 가면 그날부터 의사나 간호사나 한 번 들여다볼 것도 두 번 세 번씩 들여다보게 마련이었다. 말 한마디로 특진이 이루어지고 치료비가 예외로 깎였다. 문인들과 관계된 일이라면 언제나 소매를 걷어붙였다. 내가 대표 명색으로 있던 실천문학사에서 집들이를 겸하여 고사를 지내던 날이었다. 문인과 기자들로 발 디딜 곳이 없는 가운데 대표의 책상 위에 시루와 돼지머리가 올려졌다. 사원들부터 차례로 절을 하였다. 무당이 없으니 대표부터 차례로 꿇어앉아 희망 사항을 신고하고 두 손을 비비라는 농담이 사방에서 빗발치고 있었다. 그러나 숫기 없는 내가 나서서 그럴 터인가,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송기원 주간이 나설 터인가. 독실한 가톨 릭 신자인 이석표 상무가 그러기를 할 것인가, 꼬장꼬장한 성품의 이해찬 편집장이 그러기를 할 것인가. 손님들은 손님이라서 점잖게 서 있고, 사원들은 손님을 따라서 남의 집에 온 사람들처럼 막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 다. 그럴 때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이 유자였다. “……그저 관재수 종 웂게 해주시고,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돼서 돈두 좀 벌게 해주시고, 또 이 회사 대표 되는 늠 술 좀 작작 처먹게두 해주시구…….” 그는 두 손을 싹싹 빌어 가며 걸찍한 비라리를 대행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서너 해가 지나서 펴낸 도종환 시인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시집 출판사상 세계적인 기록을 세우며 1백만 부 이상의 초베스트셀러가 됐던 것도, 혹 유자의 비라리에 감응이 있어서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1987년이 되었다. 갑자기 다가온 그의 만년이었다. 그는 어느 개인 종합 병원의 원무 실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가 일하는 병원보다 큰 대학 부속 병원에 불쑥 입원을 했던 것도 이해 봄이었다. 가보니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보기에도 족보가 있는 병이 아닌가 싶은 증세였다. 그는 며칠 있다가 일터에 복귀했다. 걱정할 병이 아니라 하여 퇴원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긴가민가 하였으나 그 자 신이 현직 종합 병원 원무 실장이기에 자기의 병쯤은 제대로 다스릴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도 아울러 하고 있었다. 여름에 6․29선언이 있었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서울에서도 노동자들의 가두시위가 파상적으로 일어났다. 어느 날, 그가 있는 병원에 남녀 노동자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모두가 다친 사람들이었고 중상자도 여러 명이나 되었다. 장시간의 치료가 필요한 중상자의 입원조치 여부는 입원실의 배정권을 쥐고 있는 원무 실장이 결재할 사항이었다. 알아보니 복직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작전에 쫓겨 어느 건물로 피해 들어갔던 노동자들이, 뒤쫓는 추 격에 갈 곳이 없어 뛰어내리다가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입원 조치를 지시하였다. 병원장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원장은 사회면에 중간 크기의 기사로 다루어진 신문을 들이대며, 아무것도 없는 환자들이 무슨 수로 치료비를 대겠는가, 노사 분규로 해고된 사람들이니 회사에서 부담하겠는가, 뛰어내리다가 다친 사 람들이니 정부에서 보상을 하겠는가, 원장이 종주먹을 대듯이 따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병원은 환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란 말로써 대답을 대신하였다. “책임지시오.” “책임지지요.” 원장과의 언쟁은 그런 약속을 담보로 하여 끝났다. 환자들의 회복은 빨랐다. 완치된 환자가 늘어갔다. 다만 치료비가 없어서 인질로 있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그가 책임지기로 한 일이 박두한 것이었다. 그는 책임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으니까. 당직 의사와 당직 간호사만 나오는 일요일을 택하여 환자들을 모두 탈출시켰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사표를 냈다. 딱한 사람들에게 베푼 마지막 선물이었다. 실업자가 되어 집에 있으니 주춤했던 병마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 주춤했던 것이 아니라 환자들을 탈출시킬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어서 자신의 몸은 돌아볼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그를 만날 때마다 몸이 나날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걸음걸이도 걷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끌고 다니 는 형국이었다. 승용차가 있어서 그나마 외출이 가능한 것 같았다. 그런 상태임에도 남의 딱한 일이라면 외면할 줄을 몰랐다. 날이 밝기도 전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새벽에 오는 전화치고 좋은 소식이 없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 한 채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도 젊은 평론가 채광석 씨의 불행을 알리는 전화였다. 교통사고였다. 전화를 놓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니 다시 전화가 왔다. 채씨의 문인장 장례위원회에서 유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유자는 그 몸을 하고도 일을 맡아서 뛰어다녔다. 내가 치산 위원회에 배속되자 그는 쇠를 챙겨 가지고 나왔다. 채씨의 문인장 영결식이 있던 날 아침에 유자는 나와 함께 묘지로 차를 몰았다. 장지는 공원묘지의 꼭대기여서 길이 몹시 가파른데다 장마에 파이고 무너져서 거칠기가 짝이 없었다. 산에서 쓸 장 례용품을 싣고 뒤따라온 차들은 반도 오르지 못해서 시동이 꺼졌다. 유자가 나섰다. 뒤로 미끌어지기만 하던 차들을 모두 끌어올렸다. 삼십대의 젊은 운전수들이 유자의 노련한 운전 솜 씨에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영결식을 마치고 온 조객들이 산을 뒤덮고 있었다. 조객들이 열이면 열 소리로 참견을 해대니 산역꾼들도 그들 나름의 성질과 버릇이 있어서 뻗버듬하게 나왔다. 그러 나 유자가 한번 쇠를 놓자 아무 일도 없었다. 유자는 산역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비석 공장에 들렀다. 거기서도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석수가 있었다. 보령에 서 올라온 석수였다. 유자는 비석값을 깎았다. 석수는 깎자는 대로 깎아 주었다. 채씨의 묘비를 계약해 주고 귀로에 올랐다. 이시영 씨와 정상묵 씨가 동행이었다. 정씨는 양수리의 강가에서 채소 농장을 하고 있었다. 무공해 유기농업을 주창해 온 농민 운동가였다. 정씨의 농장에 들러 정씨가 담근 딸기술을 한 잔씩 했다. 유자와 내가 함께 나눈 마지막 잔이었다. 지금은 영광, 함평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 의원으로 일하는 이수인 교수가 유자의 마지막 특진을 주선해 주었다. 내 위장병을 고쳐 준 신일 병원 원장 지영일 박사의 특진이었다. 유자는 지 박사의 노련한 표정 관리에 속아 태연하게 병원을 나섰다. 나도 내내 속고 싶었다. 그래서 일 주일이 지나도록 지 박사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넘도록 전화가 없자 병원에서 먼저 진실을 알려 왔다. 간암. 여명 3개월. 남은 기간의 투병 생활에 대해서는 차마 쓸 수가 없다. 다만 한승원, 조태일, 양성우, 정규화 씨 등이 문병하던 모습, 특히 직장암을 세 축이나 수술하고도 재발하여 자신의 여명도 얼마 남지 않았던 작가 강순식 씨가 유자의 병상을 부여잡고 하늘을 부르며 기도해 주던 모습, 대천에서 국민 학교, 중학교 동창들이 버스를 몰고 와서 문병하던 모습, 그리고 유자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 “이건 혼수가 아니 야, 저승잠이야” 하고 오열하던 천승세 씨의 모습이나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 유자의 빈소에서 그의 죽마고우들이 모여 그의 개구쟁이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인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가 혹은 성님으로 모시고, 혹은 친구로서 놀고, 혹은 아우님으로 부르면서 어울렸던 문단의 원로, 문단의 중진, 문단의 신예들이었다. 유자의 장례식은 가을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달포 가량 지나서 시인 이시영 씨가 유자를 읊은 시 한 편 이 경향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경향”지에 발 표되었다. 제목은 ‘유재필 씨’였다. 유재필 씨 비가 구죽죽이 내린 날, 유재필 씨의 시신은 영구차에 실려 답십리 삼성 병원 영안실을 떠났습니다. 그 뒤를 호상 이문구 씨가 따랐습니다. 번뜩이는 익살과 놀라운 재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신은 이 지상 에 한 편의 소설도 시도 남기지 않은 채 새파란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갔습니다. 오늘은 또한 벗 채광석의 일백 일 탈상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백 일 전 오늘 유재필 씨는 채광석 장례의 지관이 되어 이산 저산을 뒤지며 터를 잡고 돌집에 내려와서는 ‘시인 채광석의 묘’라고 새긴 돌값을 깎았습니다. 돌값을 깎고 내려와선 양수리 한강변에서 장어를 사먹었던가요. 햇빛에 그을은 새까만 얼굴과 단단한 어깨, 넘치는 재담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길지 않은 생애의 대부분의 직업이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사고 처리반 주임이었으니까요. 죽음은 어쩌면 그와 가장 친숙한 길동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지요. 그는 우리들을 잠시 놀라게 하려고 이웃 마실에 간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일백 일 전에 세상을 떠난 광석이와 그를 묻고 돌을 세운 유재필 씨가 한강변의 이산 저산에서 만나는 날입 니다. “잘 있었나?” “예, 형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이곳에 좀 먼저 온 죄로 터를 닦아 놨습니다. 야, 얘들아 인사드려 라, 재필이 성님이다. 소설가 이문구 씨 친구” “이문구 씨가 누구요?” “야 씨팔 놈들아, 저 세상에 그런 소설가가 있 어!” 유재필 씨는 아직 아무 말이 없습니다. 남들이 묻힐 자리를 찾기 위해 수차례 오갔지만 아직은 좀 서먹한 산천과 무엇보다도 세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슬픔이 뼈끝에 시려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구는 잘 갔는지, 그 자식은 내가 없으면 어려운 일 당했을 때 뉘를 찾을지도 궁금하여 안심이 안 됩니다. “형님, 제 교통사고건 맡아 처리하시느라 고 수고 많으셨다메요. 저번 사십구재 때 내려가서 가족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술도 한잔 못 받아 드리고…….” 그러나 유재필 씨는 아직 말이 없습니다. 저세상에 비가 내리는지 누운 자리가 좀 끕끕합니다. 그리고 강물 소리가 시 원히 들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 산문시는 이시영 씨의 세 번째 시집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 문학사 발행)에도 실려 있다. 내가 두서없이 늘어놓느라고 못다 한 이야기가 이 시 속에 절제된 언어로 잘 함축되어 있다. 찬비를 맞으며 돌아섰던 그의 무덤을 나는 그 뒤로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를 찾아갈 수가 없다. 내가 가면 그 다정한 음성으로, “야, 너두 그 고생 그만 허구 나랑 하냥 있자야, 덥두 않구 춥두 않구, 여기두 있을 만혀…….” 하며 내 손을 꼭 붙들 것만 같아서. 이제 찬한다. 유명이 갈렸건만 아직도 그대를 찾음이여 오롯이 더불어 살은 진한 삶이었음이네. 수필이 되고 소설이 되고 시가 되어 남음이여 그 정신 아름답고 향기로웠음이네. 아아 사십 중반에 만년이 되었음이여 남보다 앞서 살고 앞서 떠났음이로다. 붓을 놓으며 다시금 눈물 젖음이여 그립고 기리는 마음 가이없어라. 01 내용 파악 평가 유 자 소 전 유자소전 (이문구) ⑷ 유자가 비단잉어의 폐사 원인을 몸살과 과로라고 대답한 것은 총수를 비꼬기 위함이다. 갈래 단편 소설, 풍자 소설, 세태 소설 ( ○ × ) 제재 유자(兪子)의 일대기 성격 비판적, 해학적, 풍자적, 전기(傳記)적 ⑸ 분기탱천한 총수는 비단잉어 회식 사건을 빌미로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전지적 작가 시점 혼용) 유자를 자녀들 등하교용 운전수로 좌천시켰다. ( ○ × ) 배경 1970년대 서울 ① 전통적 ‘전’의 양식을 차용함. 특징 ② 사투리와 비속어 등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전달함. 03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구절을 에서 골라 유자의 인격적 면모를 통해 물질 만능 주의에 주제 기호를 쓰시오. 빠진 현대 사회 비판 ㉠ 그의 생애는 풀밭에서 뚜렷하고 쑥밭에서 우 01 다음 설명에 알맞은 것을 고르시오. 뚝하였다. ⑴ ‘나’는 이 글의 ( 주인공 / 서술자 )(으)로 유재필 ㉡ 어느 날 난데없이 유자가 불쑥 찾아왔다. / 그 과 어릴 때 고향 친구이다. 는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 “뱉어낸메네또(베토벤)라나 뭬라나를 틀어 주 ⑵ ‘나’는 유재필에 대한 ( 존경 / 비판 )의 의미로 면 그 가락대루 따러서 허구, 차에코풀구 싶 그를 ‘유자(兪子)’라 부른다. 어(차이콥스키)라나 뭬라나를 틀어 주면 또 그 가락대루 따러서 허구,” ⑶ 이 작품은 ( 비속어 / 고상한 말투 )를 사용하여 ⑴ 이 작품이 일화 중심의 구성을 취하고 있음을 알 주인공을 친근하게 드러내고 비판의 대상을 더욱 수 있다. ( )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⑵ 주인공에 대한 서술자의 예찬적인 태도가 나타난 ⑷ 총수가 ( 비단잉어 / 유자 )를 소중하게 대하고, ( 다. ( ) 비단잉어 / 유자 )에게는 고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통해 총수의 위선적 면모가 강조된다. ⑶ 언어유희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며 대상에 대한 못 마땅한 심리를 드러낸다. ( ) 02 다음 설명이 맞으면 ○표, 틀리면 ×표를 하시오 ⑴ ‘유자소전’이란 제목을 통해 이 소설이 한 인물의 어휘 체크 일생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04 다음 어휘에 해당하는 뜻을 골라 연결하시오. ( ○ × ) ⑴ 숫지다 ㉠ 어울리지 않고 촌 스러움. ⑵ 유자는 총수의 승용차 운전수로서의 어려움을 제 ⑵ 귀꿈맞다 ㉡ 겉과 달리 속으로 보하기 위해 잡지사와 연락하여 ‘나’를 찾아왔다. 는 엉큼함. ( ○ × ) ⑶ 의뭉 ㉢ 순박하고 두터움. ⑶ 총수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값비싼 가격의 수입 고기인 비단잉어를 구입하였다. ⑷ 칙살맞다 ㉣ 언행이 얄밉고 잘 ( ○ × ) 고 더러움. 02 독서 후 활동 유 자 소 전 0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총수는 오늘도 연못이 텅 빈 것이 못내 아쉬운지 식전마다 하던 정원 산책도 그만두고 연못가로만 맴돌더 니, “유기사, 어제 그 고기들은 다 어떡했나?” 또 그를 지명하여 묻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한 마리가 황소 너댓 마리 값이나 나간다는디, 아까워서 그냥 내뻔지기도 거시기허구, 비싼 고기는 맛두 괜찮겄다 싶기두 허구…… 게 비눌을 대강 긁어서 된장끼 좀 허구, 꼬치장두 좀 풀구, 마늘두 서너 통 다져 놓구, 멀국두 좀 있게 지져서 한 고뿌덜씩 했지유.” “뭣이 어쩌구 어째?” “왜유?” “왜애유? 이런 잔인무도한 것들 같으니…….” (중략) 총수는 우악스럽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아랫것들하고 따따부따해 봤자 공연히 위신이나 흠이 가고 득될 것 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숨결이 웬만큼 고루 잡힌 어조로, “그 불쌍한 것들을 저쪽 잔디밭에다 고이 묻어 주지 않고, 그래 그걸 술안주해서 처먹어 버려? 에이…… 에이…… 피두 눈물두 없는 독종들…….” ⑴ 윗글에 드러난 총수의 이중적 태도를 파악해 보자. ⑵ 총수와 같은 태도가 나타나는 사례를 오늘날의 사회에서 찾아보자. 03 독서 후 활동 유 자 소 전 01 다음은 ‘유자소전’의 끝부분이다. 이 글에 드러나는 대상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를 바탕으로 하여,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보자. 유자의 장례식은 가을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달포 가량 지나서 시인 이시영 씨가 유자를 읊은 시 한 편이 경향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월간경향’ 지에 발표되었다. 제목은 ‘유재필 씨’였다. 유재필 씨 비가 구죽죽이 내린 날, 유재필 씨의 시신은 영구차에 실려 답십리 삼성 병원 영안실을 떠났습니다. 그 뒤 를 호상 이문구 씨가 따랐습니다. 번뜩이는 익살과 놀라운 재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지 만 자신은 이 지상에 한 편의 소설도 시도 남기지 않은 채 새파란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갔습니다. 오늘은 또한 벗 채광석의 일백 일 탈상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백 일 전 오늘 유재필 씨는 채광석 장례의 지관이 되어 이산 저산을 뒤지며 터를 잡고 돌집에 내려와서는 ‘시인 채광석의 묘’라고 새긴 돌 값을 깎았습 니다. 돌 값을 깎고 내려와선 양수리 한강변에서 장어를 사먹었던가요. 햇빛에 그을은 새까만 얼굴과 단단한 어깨, 넘치는 재담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길지 않은 생애의 대부분의 직 업이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사고 처리반 주임이었으니까요. 죽음은 어쩌면 그와 가장 친숙한 길동무였 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지요. 그는 우리들을 잠시 놀라게 하려고 이웃 마실에 간 것만 같습니다. (중략) 저 세상에 비가 내리는지 누운 자리가 좀 꿉꿉합니다. 그리고 강물 소리가 시원히 들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 산문시는 이시영 씨의 세 번째 시집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문학사 발행)에도 실려 있다. 내가 두서없이 늘어놓느라고 못다 한 이야기가 이 시 속에 절제된 언어로 잘 함축되어 있다. 찬비를 맞으며 돌아섰던 그의 무덤을 나는 그 뒤로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내가 가면 그 다정한 음성으로, “야, 너두 그 고생 그만허구 나랑 하냥 있자여, 덥두 않구 춥두 않구, 여기두 있을 만혀…….” 하며 내 손을 붙들 것만 같아서. 이제 찬한다. 유명이 갈렸건만 아직도 그대를 찾음이여 오룻이 더불어 살은 진한 삶이었음이네. 수필이 되고 소설이 되고 시가 되어 남음이여 그 정신 아름답고 향기로웠음이네. 아아 사십 중반에 만년이 되었음이여 남보다 앞서 살고 앞서 떠났음이로다. 붓을 놓으며 다시금 눈물 젖음이여 그립고 기리는 마음 가이없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