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Cheomseongdae)와 천문학 PDF - 신라 천문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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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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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document explores Cheomseongdae and its relation to astronomy, focusing on the Silla Dynasty in Korea. It dives into the history, structure, and function of Cheomseongdae, an ancient astronomical observatory. The document also discusses various perspectives on its role and signific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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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속의 科學 읽기 2주 첨성대와 천문학 1. 개요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천문대; 신라 왕궁터 반월성 북서쪽 성곽에서 약 300m 떨어진 지점 위치-속칭 비두골 국보 제31호, 원형을 유지하는 것 가운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한반도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후대의 복원이나 재건 없이 창건...
歷史 속의 科學 읽기 2주 첨성대와 천문학 1. 개요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천문대; 신라 왕궁터 반월성 북서쪽 성곽에서 약 300m 떨어진 지점 위치-속칭 비두골 국보 제31호, 원형을 유지하는 것 가운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한반도 고대 건축물 중 유일하게 후대의 복원이나 재건 없이 창건 당시 모습 그대로 보 존된 문화재 2. 내용 삼국유사에 7세기 중엽 선덕여왕 시대에 건립했다고 기록; 삼국유사 선덕여왕 3년, 別記 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별기에 따르면 이 왕(선덕여왕)의 치세에 석축을 쌓아 첨성대를 만 들었다) 왕력(王曆) 제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 관계와 잘 부합;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 선덕여왕 때 석탈해왕의 16세손 석오원, 첨성대를 건축했다는 주장(, 신빙성 떨어짐) 세종실록지리지; 당 태종 633년 건설, 가운데가 비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음. 돌로 쌓음, 위는 네모, 아래는 원형, 높이 19.5척, 아래 둘래 35.7척, 위 둘레 21.7척 안축, 정몽주, 조위의 시 3. 구조 높이 9.17 m, 밑지름 4.93 m, 윗 지름 2.85 m, 중간에 남쪽 방향으로 정사각형의 문, 상 하방하원上方下圓의 형상을 갖춘 돌탑 형식으로 축조 위쪽 방형의 각 면은 동서남북을 가리킴; 주술적 또는 학술적 메시지를 담았다는 주장 당대의 우주관은 천원지방(즉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나 있다고 믿는 것), 첨성대는 반대 형상이기 때문.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의 형상을 반영했다는 주장. 불경에 따르면 수미 산의 정상 도리천은 사각형이기 때문 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이용해 27단의 석축 쌓음; 1년의 시간과 28수 별자리, 혹은 27 대 국왕인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의미, 29와 30은 한 달의 길이, 12달과 24절기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으로 채우고, 맨 위에 우물 정(井)자 장대석이 있음. 과거에는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다고 추정 춘분과 추분 때는 태양광이 창문을 통해 첨성대 밑바닥을 완전히 비추고, 하지와 동지 때는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음 홍사준洪思俊; 첫 관찰자. 사다리 세 개를 마련, 한 개는 지상에서 중앙 창구까지, 한 개 는 중앙 창구 안에서 내부의 제19·20단의 ‘정井’자석까지, 나머지 한 개는 제19·20단에서 제25·26단의 ‘井’자석까지 걸쳐서 정상의 ‘井’자석 안으로 올라갈 수 있음, 오르내리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고 함. 그리고 정상부에 서거나 앉거나 또는 누워서 하늘을 관찰하는 데 매우 편리하였다고 함 아래의 기단부, 그 위의 술병형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자석井字石 정상부 등 크게 세 부분 땅속에는 잡석雜石과 목침木枕 크기의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 이 놓여 있음. 이 기초를 다진 돌 위에 2단으로 된 기단석이 놓여 있음 기단부;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하단은 5.36m, 상단은 5.18m, 두 단이 모두 높이가 39.5㎝로서 두 단을 합쳐서 79㎝의 높이.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 돌아서 있음 원통부; 높이 약 30㎝인 부채꼴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음, 27단의 높이는 8.08m, 최하 단의 원둘레는 16m, 제14단의 둘레는 11.7m, 최상부인 제27단의 둘레는 9.2m 제13∼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에 한 변이 약 95㎝인 정방 형의 창구窓口 있음; 창구의 아랫변의 돌은 대형의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 의 면적을 크게 차지함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 내벽은 선형석扇形石의 꼭지 부분이 삐죽삐죽 나와 있음 원통부의 제19단과 제20단; 각각 남북·동서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네 개가 ‘정 井’자를 이룸, 그 장대석의 끝은 원통부의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음. 같은 구조가 제25단 과 제26단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의 것이 동서, 위의 것이 남북으로 걸쳐서 ‘井’자를 이룸 맨 위인 제27단; 동쪽 절반이 평판석으로 막혀 있음. 이 평판석은 그 아래의 장대석에 놓여 있음, 윗면이 둘레의 제27단보다 약 6㎝가 낮게 되어 있음. 그리고 평판석이 없이 환하게 뚫린 서쪽 절반의 공간으로 나온 제27단의 선형석의 끝에는 3개에 걸쳐서 일직 선으로 인 턱이 패어 있음. 두께 6㎝ 정도의 나무판[木板]을 동반부의 평판석과 이 인 턱 에 걸치면 중앙에서 위로 뚫린 공간이 막히고 상부에는 ‘井’자석 안에 네모난 방이 형성 됨 제27단의 원통부 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井’자석이 두 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사각형의 정상부 이룸; 이 ‘井’자석의 길이는 306㎝, 높이와 너비는 각각 32㎝, 두 단의 높이를 합치면 64㎝, ‘井’자석이 이루는 내부 정방형의 한 변은 220㎝로 재래의 한옥 방 한 칸의 넓이 이 ‘井’자석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자리를 바로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하였음. 수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남쪽 면이 정남에 대하여 서쪽으로 약 8°가 돌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음 4. 기능 역사적으로 첨성대瞻星臺는 이름에서부터 '별[星]을 보는[瞻]' 용도로 사용되었음; 와다 유 지和田雄治 주장 조선후기까지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음, 광복 이후 새로운 견해가 등장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의 기록이 등장하지 않음, 삼국유사에는 명칭과 용도, 사람이 오르내 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그렇다고 하기엔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 천문 관측을 하는 시설, 정작 다른 천문대처럼 산 위나 높은 곳이 아니라 왕궁 옆의 평 지에 건설되었다는 점도 의문 지상에서 고작 10m 더 올라간다고 해 봐야 딱히 별을 관측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됨; 높 이로 따지면 바로 옆에 있는 왕궁 경주 월성이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 지형이라서 오히려 하늘에서 더 가깝고, 주변 남산과 토함산 등에 올라가면 훨씬 별을 관측하기 쉬움 첨성대의 역할이 천문대가 아니라 일종의 기념비 혹은 제단, 창고였을 것이라는 설이 등 장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상징물(이용범 교수; 호리병 모양, 수미산설須彌山說)', '과학 수준을 과시하는 상징물(김용운 교수)', 수학적인 비례를 이용하여 만든 건축물이라는 주비산경 설,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정연식 교수; 우물에서 세계가 나왔다는 세계관 반영)'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이 자리에 과거 천문대가 있기는 했지만, 목조 건물이었으므로 지 금은 사라졌고 폐사지의 석탑, 포석정지의 석구石溝처럼 천문대의 '부속 건물'만 남은 것 이 지금의 첨성대라는 주장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 추측에 불과, 문헌적・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불가능 주류 학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통설과 신라 천문기록의 정황 연구 등을 토대로 첨성대 가 천문대였음을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음 당시의 역사적 환경은 나라마다 다른 첨성대 또는 점성대를 만들어냈음 고대 천문학은 크게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으로 양분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역지曆志』 또는 『율력지律曆志』와 『천문지天文志』가 뚜렷하게 구 별되어 기재 천문 관측은 크게 두 분야; 첫째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태양·달·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점성占星이라는 이름과 같이 항성恒星의 배치로 정해진 별자리[星座]를 지방 또는 국가로 분배하였음 제반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 점성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계속, 고대로 올라갈수록 비중이 컸던 것 고대인의 자연철학적인 천문관측이 국가나 왕조에는 매우 중요, 되도록이면 왕궁에 가까 워야 하였음. 점성적인 것이 제사祭祀나 점복占卜과 가까울 수도 있음 직한 것 한국천문연구원의 김봉규; 신라 시대의 고천문학 자료들을 종합연구, 첨성대가 만들어진 뒤 신라 천문 관측 기록의 양이 대폭 증가, 기록 또한 자세해짐, 당시 관측된 유성의 낙 하 지점들이 모두 첨성대 주변이었다는 결론을 도출; 첨성대가 천문대로서의 실제적 기 능을 수행했음을 알려주는 정황상의 증거 첨성대의 위치나 높이에 대한 해명; 고대의 천문 관측은 현대의 천문학과는 성격이 매우 다름,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대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 이 런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당연히 왕궁에 가까워야 했음. 즉, 부지 선정에서의 고려 대 상은 천체 관측의 용이성이 아닌 교통 접근성이었음 고대국가에서 천문을 관측, 앞으로의 일을 점치는 것은 왕의 권한이자 왕권의 상징. 이러 한 관측시설이 왕궁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 당시에는 도시의 빛 공해가 거의 없고 광학망원경은 더더욱 없으므로 천문대의 높이는 그저 주변 건물 높이 이상의 하늘을 넓게 관측하는데 방해 받지 않는 수준이면 됐음; 고 려시대 첨성대나 조선시대 첨성대도 왕궁에 입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 지금의 첨성대 의 위치와 높이는 당연한 것 삼국유사 1권 왕력(王曆)편 내물 마립간 조, 내물왕의 왕릉 위치를 이야기하면서 '능이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陵在占星臺西南)'고 서술; 실제로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를 비 교해 보면 삼국유사에 언급된 '점성대'는 이 첨성대가 맞으며, '점'은 '점칠 점(占)‘, 점성술 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음 산에 가야 밤하늘이 잘 보인다는 것 자체가 도시에 전등빛이 넘쳐나고 곳곳에 고층빌딩 투성이인 요즈음 사람들의 편견, 전근대 사회에서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 중세 까지도 천문관측은 세계 어디 가든 대부분 도시 한 가운데에서 했음 토함산쯤 올라간다고 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넓은 평지에 첨성대 정 도 높이면 주변 건물에 가릴 것 없이 사방 다 볼 수 있었을 것 우리가 관측하는 천체들과 지구의 거리는 어마어마한데, 고작 몇 백m 더 가까운 곳에서 본다고 잘 보이지는 않음; 고도가 낮은 경우 단순 몇 백 미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빛 의 광해나 습도에 영향을 받기 때문, 고도와 천체 관측은 연관성이 있음; 신라시대 석탑 인 분황사 모전석탑이 40미터에 달하는 것을 생각,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딴 이유가 있다고 봄이 옳음 고대 과학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과학이 천문학 신라의 천문 관측 중시; 선덕여왕 때 국운 융성 천문학의 제도화; 형식을 갖추고 별을 관측, 별을 보는 전문가, 책을 제작 천문학은 제왕의 학 최초 기원전 1세기 전후, 일관日官과 일자日者 등장 4. 보수와 유지 첨성대의 지반은 지하 16m까지 퇴적층, 그 아래는 화강암으로 구성. 또한 북쪽 지반이 약해 급속한 침하가 이뤄질 수 있으며, 경주 일대는 활성단층인 불국사 단층선이 지나가 는 지진 위험지대이기 때문에 유지 보수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 역사적으로 경주 지역은 강진이 빈번, 조상들 역시 첨성대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 을 고안; 하부에 진흙을 채워 넣은 것도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서라는 설, 꼭대기 장대석 의 경우 모델 실험을 통해 진동이 발생할 때 일종의 지지대가 되어 하단의 돌이 어긋나 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 입증 첨성대는 현대 들어서 금이 많이 가고, 기울어짐이 심해지고 있음. 차량이 오고가면서 진 동이 전달되어 그렇다고 함; 보통 알려진 정면 사진을 보면 이상없어 보이지만, 뒷면이라 든지 다른 쪽에서 보면 훼손이 심함; 2014년 8월 문화재청의 특별 점검에서 첨성대는 D 등급을 받았음; 경주시에서 첨성대를 보수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1일 첨성대는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음 2016년 경주 지진이 일어나면서 첨성대가 원래는 중심축에서 북쪽으로 20.4cm 비스듬히 서 있었지만, 지진으로 2cm 더 기울어졌음 5. 비교 고구려 천문 관측대 추정; 고분 안의 별자리 일본; 675년 점성대 당; 723년 주공측경대周公側景臺 고려; 관천대觀天臺 조선; 관상감 관천대 3주 성덕대왕신종과 물리학 1. 개요 국보 제29호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었으나, 완성은 혜공왕 때인 771년 조선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무기를 만들 때도 세종의 지시로 보존됨 종은 봉덕사奉德寺(경주 세무서)에 달았으나 수해로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흥륜사지)에 옮겼다가, 다시 경주읍성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 1915년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고,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 신축 이전, 지금의 국립 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 일명 봉덕사종·에밀레종이라 함; 인신人身봉양의 종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거종巨鐘; 높이 3.75m, 지름 2.27m, 두께 11∼25cm. 무게 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측정한 결과 18.9톤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각 부의 양식이 풍요 화려한 동종의 하나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을 대표 어머니의 말실수로 인해 아이가 시주로 바쳐졌다는 이야기가 제일 잘 알려져 있음, 다른 내용의 전설도 존재 봉덕사에서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일전一典이라는 이름의 종장이 이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엄청 받았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전에게는 과부의 몸 으로 그 집에 얹혀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실덕으로 여겨 서 고뇌 끝에 자신의 아이를 바쳐서 종의 제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일전에게 이를 알 린다. 일전은 처음에는 이를 망설였지만 결국 부처의 뜻으로 여겨 그 청을 받아들인다. 결국 아이는 도가니에 던져지고 종이 완성되었고, 종소리는 아이가 어미를 원망하는 '에 밀레'로 들린다고 한다(최상수, 에서 발췌). 종을 주조할 때 아이를 넣었다는 인신 공양 설화는 춘추전국시대 대장장이 부부 干將과 莫耶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이미 있었음 종이 운다는 이야기는 5호 16국 시대 전량 때 세워진 간수성 무위武威市 대운사大雲寺에 있는 종이 대표적; '낭아娘呀, 낭娘'(여자 혹은 어머니) 또는 '응당應當, 응당應當' 하고 운 다고 함 이 전설이 해공왕대의 상황에 대한 은유일 것 에밀레종 설화를 신라 당대의 일로 보는 학자는 없음 성분 분석; 인간을 넣었을 경우 당연히 있어야 할 성분(뼈의 칼슘, 인 등)이 없음. 주조 과정; 종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신속한 공정이 요구, 신종을 만들 때는 소형 도가 니들로부터 동시에 주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 아이를 넣으려면 아이를 균등하게 갈아 도 가니별로 넣어줘야 하는데, 잔혹성은 둘째 치고서라도 제대로 된 종이 나올 리가 없음 살생殺生을 금기시하는 불교에서 종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희생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됨 - 5 - 2. 내용 동종을 완성하였을 당시 통일신라의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극성기를 이루던 시기, 이러 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와 같은 우수한 작품이 제작되었음 특히 선덕대왕신종의 동종 명문은 종명鐘銘의 효시일 뿐만 아니라 문장면에서도 지극히 뛰어난 것 지은 사람은 신라 혜공왕 때 한림랑 급찬翰林郎級飡 김필계金弼溪, 혹은 김필오金弼奧, 글자가 마멸되어 분명하지는 않음 종명은 630자로 된 서문序文과 200자로 된 명銘으로 짜여 있음 종명의 주제는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그리고 영원히 나라의 민중들에게 흘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지 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음 3. 구조와 특징 종신의 상하에는 견대(肩帶, 上帶)와 구연대(口緣帶, 下帶)를 둘렀고, 그 속에 주로 보상당 초문을 주문양대主文樣帶로 장식 특히 하대에 속하는 구연대는 종구鐘口가 팔능형八稜形을 이룬 특수한 형태 팔능형의 윤곽형이 되는 능稜마다 당좌撞座와 유사한 대형 연화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 특징 견대 밑으로는 4개소에 연주문 안에 견대에서와 같은 보상당초문양으로 조식된 유곽을 둘렀으며, 그 내부에 돋을새김 연화로 표현된 9개의 유두乳頭가 들어 있음 유곽 밑으로 종신에 비천상飛天像 2구軀를 상대적으로 배치, 그 사이에 서로 어긋나게 8 판瓣의 연화당좌 2개를 배치 오대산 상원사동종의 명문이 동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에 명기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종신에 장문의 명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것은 신라 동종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징 전체적인 동종의 조각수법은 동양 어느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종巨鐘, 동 시에 상원사동종과 더불어 최대의 조각 양식을 구비한 동종銅鐘 종신에 2구씩 마주보는 4구의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세우고 공양하는 상; 주위에 보상화寶相花를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게 하고, 천상天上으로 천의天衣와 영락瓔珞 등이 휘날리고 있는 것은 다른 신라 동종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비천상, 한국 비천상의 대 표가 되는 조각 수법 종정鐘頂의 용통甬筒; 즉 음관音管에도 몇 개의 단段, 단마다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으로 된 화려한 연판蓮瓣이 장식, 용뉴龍鈕의 용두龍頭와 몸체도 박진감 있고, 사실적인 조각 수법으로 생동감을 주고 있음 4. 의의와 평가 동종의 명문 내용과 종의 형태에 대한 고유섭高裕燮의 해석; 팔화八花는 팔음八音을 상 징. 화엄의 유乳를 없애고 36화花를 안배함은 삼귀계三歸戒를 옹호하기 위한 36선신善神 의 상징 “大音震動於天地間, 聰之不能聞其響, 是故憑開假說, 觀三貴之奧義, 懸擧神鐘 悟一乘之圓 音”고 한 것은 신종의 법기法器로서의 존재 이유일 것 동북아시아의 대종들은 대개 맑고 높은 소리보다는 진중하고 길게 울리는 소리를 내도록 - 6 - 만들어져 있음, 그 기술의 정점에 있는 것이 성덕대왕신종 신라 최대의 종은 경덕왕 때 만들어진 황룡사의 황룡사 대종, 규모가 성덕대왕신종의 무 려 4배. 안타깝게도 여몽전쟁으로 황룡사가 파괴될 때 소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은 에밀레종보다 46년 빨리 만든 상원사 동종(국보, 725년 주조, 1.7 m)이 가장 오래된 종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음,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음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 어 있음 몸체 앞과 뒷면 두 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음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 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가 종의 특징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 화려한 문양과 조각 수 법은 시대를 대표 몸통에 남아 있는 1,000여 자의 명문, 문장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 동아시아에서 범종의 우열은 맥놀이 중시 완전한 좌우 대칭은 맥놀이 발생하지 않음 주재료 구리와 주석의 비율 다름 좌우도 완전한 대칭 아님 쇳물 부을 때 들어가는 공기의 양과 밀도도 다름 종을 구미는 각종 장치도 어긋남; 용뉴, 음통, 유천상, 유곽 비대칭 종의 크기 큼 50여 가지의 소리; 고주파, 저주파 - 7 - 4주 고려청자와 화학 1. 개요 청자靑磁·백자白磁·흑유자黑釉磁·철유자鐵釉磁 등 고려시대에 제작된 자기를 말함, 일반적 고려청자를 지칭하는 말로 인식 고려도자陶磁 혹은 고려청자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미술 을 정치사적으로 구분한 데서부터 유래 특히 고려시대에 청자가 성행; 예술적 가치가 다른 나라의 청자와 비교해 볼 때, 뚜렷이 구별될 만큼 독창적이고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왔음 최근에 이르러서는 청자가 신라 하대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제작되었다는 사 실이 밝혀짐, 고려도자 또는 고려청자라는 말은 차차 청자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 청자란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그릇 가운데 가장 훌륭한 그릇 가운데 하나 송이나 고려대에는 청자가 세계 최고의 그릇, 두 번째 청자를 만든 나라가 고려 2. 제작 토기; 찰흙으로 섭씨 800~1100도度(°C)에서 구운 그릇 도자기陶瓷器, 陶磁器; 도기와 자기는 구분 도기; 찰흙이라고 부르는 붉은 색의 진흙에 석영과 장석을 섞은 도토陶土를 가지고 만든 것. 이 흙을 500도에서 1,100도(1200도 미만) 사이의 온도로 구어서 그릇을 만듦 자기; 도기보다 질이 우수함. 자기는 인류 최고의 그릇. 자토瓷土(고령토나 석영가루를 산 화철을 포함한 찰흙에 섞은 것)로 만듦. 자토는 1,200도 이하에서는 익지 않고, 1,300도 정도가 되어야 익음. 높은 열에서 흙을 구우면 흙이 훨씬 가볍고 단단해짐 온도가 1,300도나 되는 곳에서 녹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흙; 반면에 금속인 동銅으로 만 든 종도 1,000도 이하에서 녹음 자토; 돌가루로 되어 있고, 색깔은 흰색이나 회색을 띠고 있음, 이것을 고령토高嶺土라고 함, 흰 빛깔에 철분 1~3% 머금은 고운 흙 고령토, 중국에서는 카올린(Kaolin); 고령토로 천연 광물질인 함수규산알루미늄실리케이트를 말함,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백악(白堊은 탄산칼슘으로 된 암석, 영문명은 Chalk)이라 칭하며 약재로 사용하였다고 기록, 카올린은 황토나 일반 머드에 비해 살균력이 높음, 화장품 원료로 사용 유약釉藥 발달; 고령토로 그릇에 청색 유약을 입히면 청자, 백색 유약을 입히면 백자 청자는 소所라는 특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만들었음, 전국에 청자를 만들던 도요 지가 있었음 특히 강진과 부안은 유명한 청자 도요지; 이곳은 흙의 품질이 좋고 기온과 강수량이 알 맞아 최고의 청자가 생산되었음 강진과 부안의 청자는 바닷길을 이용해 개경으로 운반되거나 중국으로 수출 청자는 고려의 귀족들이 사용하던 고급품, 고려 말기에는 차츰 비색을 잃고 무늬도 단순 해지면서 쇠퇴 이후에 분청사기粉靑沙器라는 새로운 자기가 만들어지게 되었음; 청자 위에 장식했다는 - 8 - 뜻 백자를 만들려면 산화철이 없는 자토를 만들어야 함 청자와 백자는 취향의 차이 명나라 때 청자에서 백자로 전환 나무가 타고 남은 재를 물에 탄 것 그릇을 만들 때, 한 번 구운 다음 이 물(유약)을 발라 다시 구우면 그릇이 완성 유약을 발라야 그릇이 아름다워지고, 흉터도 나지 않으며 방수 처리됨 유약은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모르면 이용할 수 없음 유약을 발견하게 된 경위; 청자가 나오게 된 배경과도 관계가 깊음, 그릇을 굽는 가마에 서 어 느 날 나무의 재가 그릇 위에 앉게 됨. 그 부분이 푸른색을 띠면서 막이 생겼음. 이게 바로 유약 예) 소나무나 참나무 재가 1,200도 같은 고온에서 녹으면, 콜라병 같은 유리색이 남 북한학자; 바탕흙은 장석(고령토 포함) 10% 미만 + 흰 흙 80% 정도 혼합, 알카리성 원 소는 미미, 규소Si와 알류미늄Al의 화합물 고경철; 산화철의 함량이 평균 1.8%, 송나라 청자의 3%보다 적음, 고려청자가 회색빛이 나는 것은 망간Mn의 함량이 높기 때문 청자는 옥玉을 인조로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에서 나왔음 옥; 고대 중국에서 매우 귀중한 돌,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곡옥曲玉이라 해서 굽은옥을 왕관처럼 아주 귀한 곳에 썼음 중국인들은 옥을 흙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토기土器, 즉 질그릇에 앉은 재가 푸 른색을 내는 것을 보고 청자를 만들기 시작 중국에서는 청자가 이미 3세기부터 만들어졌음, 역사가 대단히 오램 청자라고 할 때 blue청이 아니라 green청임; 청자보다 녹자綠瓷라고 부르는 게 정확 청자가 중국에서 실용화되고 보급된 것은 9세기경 선승禪僧들이 차를 많이 마신 이후, 청자로 찻잔을 만든 것 청자 잔은 선불교가 유행하던 고려에도 수입; 고려인들은 청자기를 스스로 만들려고 했 음 청자; 800~1300도에 달하는 높은 온도의 가마에서 두 번 구워 만드는 비법(푸른색); 첫 번째 굽기와 두 번째 굽기 사이에 잿물을 바름, 잿물 속의 철鐵 성분과 흙이 반응하여 푸른빛을 띠게 됨 초기에는 비색翡色이라 부르는 순수한 푸른빛의 순청자가 대부분 고려가 청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송宋에서 온 송나라 도공陶工들에 의해서였음 송이 혼란에 빠졌을 때, 송나라 도공들에게 고려 조정이 후한 대접을 약속하고 그들을 유치 - 9 - 송나라 귀화인으로 고려 조정에서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하게 한 쌍기雙冀가 주도 고려는 10세기 후반에 개경 근처에서 처음으로 청자를 만듦; 청자를 늦게 만들게 된 것 은 이 기술이 최고의 하이테크에 속했기 때문 일본은 17세기 초에 조선의 도공들이 임진왜란 때 끌려가서 자기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뒤에야 만들기 시작 유럽은 더 늦어서 18세기 초가 되어서야 독일의 작센 지방에서 자기를 만드는 데 처음 으로 성공; 유럽 도자기의 출발점, 독일 마이슨(센) 지역 명칭, 아시아의 경질 도자기를 유럽에서 처음으로 제조, 1710년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가 공장 설립, 세계 4대 명품 도자기 중 하나 최고의 그릇을 만들 수 있었던 나라는 중국과 고려 두 나라뿐 고려청자는 중국의 것을 두 가지 면에서 앞섰음; 상감기법과 뛰어난 비색 상감기법; 원래의 기물에 홈을 파서 다른 재료를 넣는 것 표면에 무늬를 새겨 넣는 법; 청자 겉면을 얇게 판 다음 학이나 꽃의 모습에 맞게 백토 나 자토를 그곳에 넣음 구워진 후에 백토는 흰색, 자토는 검은색으로 나옴 상감기법은 중국에서는 전국시대(BC 5~BC 3세기)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음; 이때는 철이 나 동으로 만든 그릇에 홈을 파고 금실이나 은실을 넣었음 고려에서는 갓 빚어낸 청자에 무늬를 새기고 흰색과 붉은색 흙을 무늬에 밀어 넣어 멋진 무늬를 창조해 냈음; 고온에 녹지 않는 은입사銀入絲 방법 고안 두 가지 색깔의 흙은 가마에 넣어 초벌구이를 한 뒤, 유약을 발라 두벌구이를 하면 마술 처럼 변함; 흙의 철분鐵分이 산소와 결합하면서 흰 흙은 뽀얗게, 붉은 흙은 검게 되어 푸 른 바탕색과 어울리며 아름다움을 더해 줌 고려는 상감기법을 도자기에 처음으로 응용,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 상감청자는 자기 표면의 흙을 파낸 뒤 다른 색의 흙을 채워 무늬를 만듦; 때문에 일반 청자에 비해 화려하고 다채로운 멋을 풍기는 것이 특징 비색도 중국에 있던 것, 고려청자의 비색이 신비로울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중국을 능 가했다고 함 가장 좋은 비색이 나오려면 유약에 3%의 철분이 포함되어야 함; 이보다 덜 포함되어 있 으면 약한 연두색, 더 많이 있으면 아주 어두운 녹색이 나옴 철분이 어떤 나무에 있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 아주 숙련된 도공들만 알 수 있다고 함, 아마 고려의 도공들은 이런 비밀을 알고 있었던 모양 12세기 전반기에 순청자, 후반기에는 상감청자 시대 순청자는 청자 고유의 고운 빛깔과 다양한 모양새가 매력적, 특히 고려청자의 빛깔은 비 색, 중국의 비색秘色과 구별해 부를 정도로 돋보임; 중국 청자가 약간 진하고 어두운 빛 깔, 고려청자는 맑은 가을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투명하고 고운 빛깔 비색은 흙과 유약의 화학반응의 산물 - 10 - 3. 의미와 가치 고려청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실용적인 그릇 귀족문화의 산물; 소비 욕구가 명품을 낳음 몽고 침략 후 무인정권기에 쇠퇴 중국인들은 조선 백자白瓷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고려청자는 너도나도 갖고 싶어 했음 높은 수준의 기술과 미학을 가지고 있던 나라가 고려였음 송나라의 한 사신(태평노인)이 ‘고려의 비색(푸른빛)은 천하제일’이라고 칭송함 기술은 어떤 형태로든 조선으로 전승, 지금 우리에게도 전수되었을 것 임진왜란; 도자기전쟁, 도자기 수출국 요즘 우리나라 회사들이 서양 기술을 가져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설명 할 길이 없음 신안해저유물 발견; 생활용품, 서민 사용 확인 본차이나Bone China; 영국제 그릇, 산업혁명의 일환. 골회자기骨灰磁器 또는 본차이나는 도자기 종류의 하나. 뼛가루와 장석, 카오리나이트(고령토, 또는 고령석)라는 광물을 재료 로 하여 만들어진 도자기, 영국에서는 카오리나이트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대용품으로 소뼈를 사용한 것이 시초,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토마스 프라이Thomas Frye 로 1748년 런던 동쪽의 보우Bow에 있는 보우 도자기 공장, 1789년~1793년 사이에 조지 아 스포드가 스토크에서 더 발달시켜서 공정을 마무리 세계 4대 명품 도자기; 독일의 마이센, 영국의 웨지우드, 헝가리의 헤렌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혹은 중국 도자기(청자, 백자), 조선 백자(한국), 마이센 도자기(독일), 이마리 도 자기(일본) - 11 - 5주 장경판전藏經板殿과 지구과학 1. 해인사 해인사는 신라 의상 대사의 법손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애장왕 3년(802)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화엄십찰華嚴十刹 3대 사찰; 법보法寶사찰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海印이라는 낱말에 응집 해인; 화엄경의 해인삼매三昧에서 비롯, 해인삼매는 일심법계一心法界의 세계를 가르치는 말,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 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로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에 건립, 대장경 목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세계 유일의 건 축물 효과적인 건물 배치와 창호 계획을 고려, 동시에 경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방식을 활용 대장경판을 오랜 기간 효과적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자연통풍과 적절한 온도 및 습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 건물 안에 있는 판가板架도 실내온도와 습도가 균일하게 유지되게 배열 과학적 방법은 600년이 넘도록 변형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의 보존 상태에서 효과 입증 2. 구성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비로자나부처가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냄 국보 장경판전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음;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 진 때가 1397년, 조선 초인 1488년쯤에 세운 것,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 쳐서 오늘에 이름 장경판전은 모두 4동으로 구성;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法寶殿,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 修 多羅殿,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 동의 건물에는 사간판私刊板 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동· 서 사간전 3. 제작 팔만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 대사리大寺里에서 제작 1318년 강화산성 서문 대장경 판당判堂(선원사禪源寺)으로 옮김 강화 선원사; 고려시대에 몽고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직후, 최고 통치자 최우(崔瑀, 최이崔怡)가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심혈을 기울여 세운 시찰; 송광사와 - 12 - 더불어 고려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히는 큰절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대장도감大藏都監도 선원사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 충렬왕대에 원나라에 대해서 일어났던 반란군이 고려로 쳐들어왔을 때, 왕이 피난하여 임시 궁궐로 쓰기도 했던 곳 고려 말 빈번한 왜구倭寇의 침범, 1398년 현재의 보관소로 옮김 장경판전 터; 본래 토질 자체도 배수가 잘 되는 토질(마사토磨沙土), 숯과 소금, 횟가루 와 찰흙을 넣음; 방수 효과(여름철의 습기가 많을 때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 는 습기를 내보내어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 벽체; 흙(여름에 온도를 낮추고 습도 조절) 판전의 창문; 격자창格子窓 모양, 수다라전의 창은 아랫창이 윗창보다 세 배로 크며, 법 보전의 창은 반대꼴을 이루고 있음; 창문의 크기 다름 과학적인 통풍 방법;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도 따라가기 어려운 선조들의 슬기를 보 여 줌, 보존 과학 극치 내부 온도 일정; 바깥보다 0.5~2도 낮고, 습도도 조절하여 5~10% 낮음 1)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경판經板을 봉안하기 때문에 사격寺格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만 한 곳에 위치; 해인사 경내의 맨 뒤쪽, 가장 높은 곳에 판전 건물 자리, 법보사찰 해인사 의 상징 2) 장경판전은 건물이 자리할 입지와 건물 자체의 과학적·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여 경판 을 잘 봉안할 수 있도록 처리했음; 판전 건물의 입지를 해발 1,430m인 가야산의 중턱 약 655m 높이, 서남향으로 배치; 바람과 햇빛으로 건물 내부의 적절한 온도 유지와 원활 한 통풍과 습기 방지 서남향은 건물 주변 어느 곳에도 영구히 음영이 생기지 않는 배치 수다라장과 법보전; 대장경판 보관을 목적으로 지었으므로 장식이 거의 없는 소박한 건 물 판전板殿; 약 60cm 높이 정도의 기단, 대체로 네모지거나 불규칙한 모양의 자연석 위에 기둥 얹음(그렝이기법) 기둥; 바깥 기둥은 둥글게 깎은 두리기둥으로 약간 배흘림, 건물 안의 중앙 기둥은 네모 기둥, 바깥 기둥의 위에는 단익공單翼工을 짜 넣어 대들보를 받침 대들보; 높은 중앙 기둥의 옆구리에 고정, 이는 반대쪽에도 동일하여 대칭을 이룸. 높은 중앙 기둥의 위와 좌우로 걸쳐진 대들보의 가운데, 다시 작은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연 결, 건물 안 중앙 기둥의 위에는 다시 기둥을 지붕머리와 연결하여 건물이 더욱 견고하 게 보강 구조는 단순할지라도 공기 흐름을 원활히 하는 데 가장 많은 신경을 쓴 것 내부 바닥은 흙바닥 경판꽂이; 판전의 길이 방향과 같이 설치, 적당한 공간을 두어 상하좌우의 공기 흐름이 원활하도록 고안 건물 바깥벽에 설치한 붙박이 살창撒窓; 판전 안의 공기 흐름을 배려한 설계, 벽면의 아 래위 및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하여 대류현상을 이용하는 절묘한 기술 발휘 - 13 - 건물의 앞면;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중방中枋을 걸치고, 붙박이 살창을 아래위로 설치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살창 모양은 비슷하나 크기가 약간씩 다름; 대류 고려 장경판전; 조선 초기의 전통 목조건축 양식, 미적인 면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배치, 규모, 목판 보존을 위한 기능성 면에서 전무후무한 건물, 자연 환기가 되고 온도와 습도가 조 절되게끔 각별하게 설계, 기후 조건에 적응 귀중한 목판; 600여 년 동안이나 설치류齧齒類, 벌레 등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음 판가板架; 5단 선반, 단의 높이에 여유, 공기 순환 현상 수다라장; 앞 벽면의 아래 창이 위 창보다 4배, 뒷벽은 위 창이 아래보다 1.5배 법보전; 앞 벽면의 아래 창이 위 창보다 4.6배, 뒷벽은 위 창이 아래보다 1.5배 판전; 서남향 건물, 앞쪽보다 뒤쪽의 온도가 낮고, 습도가 높음 판전으로 공기가 들어갈 때 습한 공기는 아래로 쳐짐; 위 창보다 아래 창을 작게 하여 습한 공기가 적게 들어가게 설계 판전에 들어간 공기는 경판의 수분을 빼앗아 들어올 때보다 무거워지고 아래로 쳐짐; 습 한 공기가 앞문 살창으로 빠져나가도록 아래 창을 크게 함 건조하여 위로 올라간 공기는 오랫동안 판전에 머물도록 앞면의 위 창은 작게 만듦 판전의 선반; 무거운 경판을 견뎌야 하므로 튼튼하게 만듦, 선반이 넘어지지 않게 사각기 둥을 세우고 서로 연결 경판꽂이; 판전의 가운데 한 줄, 뒷벽 쪽에 한 줄, 건물의 길이 방향인 동서로 두 줄 배 치, 건물 안의 공기가 상하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 역할(대류현상) 5. 제작과정의 과학성 기록에는 없으나 대장도감大藏都監을 강화도에 설치, 2년 뒤 본격적인 판각 작업이 진행 된 것 경판을 만든 재료;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지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白樺木, 거제목이라 고 부름) 표본 수집 분석;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대부분, 거제수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후박나 무 순서, 내구성 강한 수종 대장경 조성사업은 워낙 큰 대규모의 국가사업, 진주 지방 남해 연안에 분사대장도감分 司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판각을 나누어 진행 분사도감 장소가 진주, 남해가 정해진 까닭; 첫째, 몽골의 병화가 미치기에 쉽지 않은 남 해안 지방, 무신 권력의 핵심인 최우의 근거지였기 때문(진양강씨晉陽姜氏) 둘째, 팔만대장경 판각 위한 경판재료를 가까운 거제도와 지리산에서 쉽게 구하여 바닷 가에서 제대로 제작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섬진강과 바다 이용 수송 용이) 경판 자체가 부패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고 나무 재질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 해, 해충과 부패 방지; 원목을 바닷물에 3년 동안 담궈 두었다가 꺼내어 판자로 짠 다음, 다시 그것을 소금물에 삶아 그늘에 말린 뒤 깨끗하게 대패질하여 판 만듦 통풍 조절; 경판 나무는 공기 중의 수분과 소통, 공기가 습하면 수분을 빨아들이고 건조 하면 수분을 내놓음, 계절별로 경판이 갖는 함수율含水率 일정, 평형함수율 15~16% 일 정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양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 붙임 - 14 - 경판 크기; 72.6 x 26.4cm, 두께 3cm, 23줄에 14자씩 부식 방지; 옻칠을 해서 마무리 손질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네 귀에 동판銅版으로 고정, 한 장의 경판 완성 구리 고정 못; 부식 방지, 망간Mn 함유의 저탄소강(탄소 함량이 적은 철) 세심하게 제작한 까닭에 7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판들 모두가 썩는다든가 좀먹 는다든가 뒤틀리는 일 없이 온전히 보전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 6. 의미 세계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 세계 유일의 현전 대장경판 목판 인쇄술의 진수 식자 및 활판술에서의 중요성 인쇄 기술의 통합된 발전 자연환경을 활용한 과학적 구조물 5주제 화약의 역사와 화학 1. 화약의 유래 불꽃놀이의 역사; 고려시대 이색李穡; 산대놀이(탈놀이)에서 본 불꽃놀이; “긴 장대 위의 곡예는 평지를 걷는 듯하고, 폭발하는 불꽃은 벼락처럼 하늘을 찌르네.” 송나라의 불꽃놀이가 고려 전래 이규보李奎報; 폭죽놀이(화약 없이 대나무에 불을 넣어도 갈라지면서 불꽃이 튐) 정조正祖; 득중정 어사도(화성행궁에서 땅속에 화약을 묻고 터뜨림) 새해 불꽃놀이; 강한 폭발력이 잡귀신을 잡고 나쁜 기운을 몰아냄 18~19세기 서양; 전염병을 몰아내려고 대포를 쏨 나쁜 것을 몰아내는 것은 불꽃놀이와 대포가 같음 2. 화약의 역사 불꽃놀이 화약은 전쟁용 화약과 같은 원리 기본 재료; 염초焰硝(숯과 유황(황)) 염초는 초석硝石의 옛 이름, 주성분은 질산칼륨KNO3 이탈리아의 소브레로; 1846년 폭발력이 강한 물질을 처음 만든 사람; 니트로글리세린은 폭발력은 강하지만 액체여서 다루기 힘듦 니트로글리세린C3H5(ONO2)3; 무겁고 무색, 중독성과 유성을 띤 폭발성 액체, 글리세롤 을 질산염화함으로써 얻어짐 스웨덴의 노벨; 1865년 니트로글리세린+칠레초석(흡착제), 고체 화약, 다이너마이트 Dynamite 흑색화약; 니트로글리세린 이전, 중국의 연금술사 발명 - 15 - 불로장생의 약인 금단金丹을 얻고, 영원히 사는 법을 찾기 위해 연금술 시작 납, 수은, 자석, 웅황雄黃 등 광물질로 금단 제조 가능; 당나라 절정기(도교道敎), 많은 금 속과 비금속 물질 혼합 시도(염초, 유황, 숯) 염초를 태우면 불꽃이 생기는 현상 파악; 세 물질이 특정 비율일 때 대폭발 경험(10세기) 연금술에서는 금단을 만드는 각종 재료를 약藥이라 함; 불타는 약(火藥)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 변환설(불Fire, 흙Earth, 공기Air, 물Water) 바탕, 값싼 물질을 값 비싼 금으로 바꾸려는 것, 주술적 성격을 띤 일종의 자연학, 비금속을 인공적 수단으로 귀금속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 7세기에 화약 제법 제조 연단술사이자 의사 손사막孫思邈; ≪단경丹經≫의 에서 복화伏 火를 제조하는 방법 상술 “유황과 초석이 각각 2냥씩 든 항아리에 조각자(皁角子, 쥐엄나무 열매의 씨) 3개를 넣고 불을 지펴 불꽃이 일어날 때 목탄木炭 3근을 넣는다. 목탄이 3분의 1쯤 탔을 때 불을 끄 고 혼합물을 꺼내는데, 그것이 바로 ‘복화’다.” 유황, 초석, 목탄은 화약과 동일한 성분; 복화를 화약의 시초 화약이란 단어; 도교의 경전을 집대성하여 1445년에 발간된 ≪도장道藏≫에서 등장 화약은 오랫동안 약재의 일종으로 간주 1596년 이시진李時珍이 편찬한 ≪본초강목本草綱目≫; “화약은 창선瘡癬과 살충에 주효 하며, 습기와 온역溫疫을 제거하기도 한다.”고 소개 화약의 다른 용도는 불꽃놀이; 중국 사람들은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 화약을 터뜨리 면서 액운과 재앙이 떠나가기를 기원 화약火藥(gunpowder)은 중국의 3대 발명 혹은 4대 발명의 하나로 간주 17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베이컨Francis Bacon; 세상을 바꾼 3대 발명으로 화 약, 나침반, 인쇄술 19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활동했던 영국의 선교사이자 한학자 에드킨스(Joseph Edkins); 기존의 3대 발명에 종이를 더해 4대 발명을 주창 20세기에 ≪중국의 과학과 문명≫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사학자인 니덤(Joseph Needham);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 모두 중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점 확인 화약은 서양의 봉건제가 해체되고 근대사회가 출현하는 데 크게 기여 3. 화약의 무기화 화약은 사람을 헤치는 살상 무기로 관심 군대; 화약의 폭발력으로 무거운 물체를 먼 데까지 날릴 수 있음, 불을 뿜는 화염 방사가 적에게 큰 공포를 줌, 화약이 폭발할 때 나는 굉음이 적을 두려움에 떨게 함 송나라 ≪무경총요武經總要≫ 편찬; 축적된 화약과 화약 제작의 비밀 화약이 군사 무기로 사용된 시기는 8세기 이후 ≪신당서新唐書≫에 784년 이희열李希烈이 방사책放射策으로 병영을 불살랐다는 기록 ≪구국지九國志≫에 904년 날아다니는 불을 쏘아 성문을 불태웠다는 기록 화약 무기는 송나라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개발 - 16 - 송나라의 수도 변량汴梁; 군사 장비를 만드는 국영 수공업장 설치, 화약과 화기를 제작하 는 화약요자작火藥窯子作이 있었음 증공량曾公亮; 1044년 군사병법서 ≪무경총요武經總要≫를 편찬. 화약무기에 대해 자세 히 서술, 화약을 이용한 창, 화살, 포에 해당하는 화창火槍, 화전火箭, 벽력포霹靂砲 등 4. 고려의 화약 1104년; 여진족 정벌, 발화發火 부대 1135년; 묘청妙淸의 난 진압, 수류탄의 일종 사용 1274년; 몽골과 고려 연합군 일본 원정 때 화약과 화포 사용 1356년; 왜구와 전쟁, 화통火筒(화약을 써서 화살이나 포탄을 날리는 무기)을 써서 화전 火箭(불화살)을 날렸다는 기록 1373년; 공민왕, 명 영락제에 화약 요청 1374년; 명나라 남해안 왜구 침공, 염초 50만 근(300t), 유황 10만 근 보내줌, 배합법을 모르면 소용이 없음 1375년; 최무선崔茂宣, 명나라 군사비밀 화약 제조법을 알아냄, 화약 제조에 필요한 염 초, 유황, 숯 중에서 염초를 얻는 공정이 까다로움, 염초 제조 위해 첩보 수집, 송은 ≪무 경총요≫에 화포 내용만 게재, 염초 제조법은 싣지 않음, 화약 제조법 통제 1375년; 염초장 출신 상인 리웬李元 만남, 융숭한 대접, 화약 제조법과 염초의 비밀을 알 아냄, 원나라에서 명나라로의 혼란기여서 통제 느슨함 1) 영락제가 준 원료로 화약을 제조했을까 2) 원나라에 대응하기 위해 명과 손잡은 고려는 화약의 배합법을 알지 않았을까 3) 1380년 진포대첩 때 최무선의 고려군은 화포와 화약을 써서 왜구 배 500척 부숨, 이 때 염초는 어디서 구했을까 ; 세 가지 의문의 핵심은 화약 원료의 자급 능력, 명나라는 고려가 염초의 비밀을 풀 능 력이 없다고 생각 비슷한 시기에 이슬람, 서양, 안남安南(베트남)과 함께 고려 염초 제조 성공 화약 성능 개선, 화포 개발에 적극적 5. 고려~조선의 화기 발전 화포와 화약은 나라를 지키는 핵심 기술 화약을 제조하고 화기를 만들고, 총포부대를 조직하고 조련하는 일을 지속함 1377년; 화통도감火㷁都監 설치, 책임자 최무선, 18종의 무기 생산, 왜구 격파를 위해 화 약과 화포를 장착한 전투용 배 건조 화약과 화포만을 전문으로 하는 화통방사군火桶放射軍 설치 1380년; 전라도 진포 침공한 왜구 선박 500척 무찌름 사용 화기; 화약, 총통, 신기전神機箭과 화차,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화포를 장착한 전선 1) 화약 화약은 제조 부분에서 개량, 우리나라 최고 기술 아님, 최무선이 만든 염초가 대단해도 - 17 - 중국 기술 개량 수준 최무선이 남긴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이라는 책이 사라지고 없음, 비교 불가 1635년; 무신 이서李曙, 신전자취염초방新傳煮取焰硝方에서 염초 얻든 개량 방법 취득, 끓여서 염초를 얻는 새로운 방법, 길이나 담 밑에 있는 색이 검고 맛이 매운 흙에 쑥을 태운 재와 곡식대의 재를 섞은 다음 물을 넣고 끓임 1695년; 역관 김지남金指南, 중국에서 알아낸 방법을 신전자초언해방으로 간행 2) 총통銃筒 화약을 폭발시켜 철환 같은 탄두를 발사하는 화기, 화기는 불을 뿜는 기기 장점; 다양한 종류의 화기를 만든 점, 총통 안에 격목隔木으로 화약을 눌러 폭발력을 키 울 수 있도록 설계해 포환이 멀리 날아간 점, 총통에 마디를 많이 두어 견고한 점 단점; 개인용 화기의 발달이 늦음, 개인용 화기는 한 손으로 화기의 몸체를 잡고 한 손으 로 종이 심지에 불을 붙이므로 명중률이 낮음, 사격 후 반동을 흡수하는 장치가 없고 화 포의 장전시간도 길고 사용 방법도 복잡 3) 신기전과 화차 (1) 신기전神機箭 신묘한 쇠뇌 화살, 화약을 이용해 날아가는 화살 최무선이 만든 주화走火; 화약을 담은 약통을 화살에 달아 그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는 로켓의 일종 최해산崔海山; 주화의 제조 기법을 발전시켜 신기전 만듦. 큰 것, 작은 것, 흩어져 폭발하 는 것 세 가지 제조, 작은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폭발력을 가진 발화통 설치 단순히 멀리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폭탄 불화살 흩어져 폭발하는 산화 신기전은 발화통 안에 2차 추진체가 있어 폭발을 한 번 더하는 화살 (2) 화차 조선 문종; 한 번에 신기전 100발을 쏘는 발사체인 화차 제조, 화차는 뛰어난 발명품 바퀴를 달아 이동 가능성을 높이고, 각도 조절의 폭을 넓혀 신기전을 먼 곳까지 쏠 수 있는 장치,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장군 행주산성 전투 승리(화차 300대, 군사 2,300명으 로 일본군 30,000명 격파) 4)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조선시대 수류탄, 임진왜란 진주성 탈환 때 역할 이장손李長孫; 화포 장인 개발, 벼락을 치는 듯한 폭탄이라는 진천뢰震天雷 바로 터지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에 터지는 폭탄, 중국에서 개발 총통으로 발사, 날아 온 것을 살피는 순간 터지도록 설계 이전까지 화약의 역할은 폭발력으로 철환 등을 멀리 날리는 데 있음, 철환에는 화약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단순히 성을 파괴하거나 적진을 흩어놓는 역할에 그침 철환이 폭발하면서 적군과 적진을 흔들어 놓고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폭탄 5) 화포를 장착한 전선 판옥선板屋船과 거북선(龜船) 이순신李舜臣 장군, 임진왜란 승전 요인 화포를 장착한 함대의 운용은 세계 전쟁사에서 높이 평가, - 18 - 동아시아 세력의 판도를 바꾼 주역 6. 화포 발전의 정체 16세기 이후 전쟁에 고전 19세기 서양과 일본에 굴복; 화약과 제조 기술의 격차 발생 서양의 무기 발달; 많은 전쟁 수행 조선후기 평화의 시기 6주 은의 제련과 화학 분리 1. 개요 원소기호 Ag, 원자번호 47, 원자량 107.868, 녹는 점 960.5℃, 비중 10.5 은의 영어 이름 silver는 앵글로-색슨어 seolfor에서 유래. 원소기호 Ag는 은을 뜻하는 라 틴어 argentum에서 유래; 그리스어로 ‘빛나는’ 또는 ‘흰색’을 의미하는 ‘argos’에서 유래 속성상으로 금과 합금 상태로만 산출, 그 밖에 납·구리·아연 등의 광물에 함유될 때가 많 음 초기에는 은 광석에서 은을 분리·회수 비금속非金屬 광석에 소량의 은이 들어있음; 주 금속을 생산하고 남은 찌꺼기를 화학 처 리, 은을 녹인 다음, 용액을 전기분해 해서 은 회수 은백색 광택, 금속 중 전기 및 열의 전도도가 가장 크고 전성展性·연성延性이 금 다음으 로 큼 화폐로 쓰이는 것, 장식품·식기·합금용 등, 사진 공업 재료 화학 반응성이 아주 적은 비활성 금속(noble metal); 은화나 은제품이 오래 두면 검게 되 는 것은 황화은(Ag2S)이 만들어지기 때문 2. 우리나라 은의 역사 신라 고분; 출토된 여러 금속장식품 중, 특히 금·은세공품들은 은을 이용하는 기술이 높 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사 1177년(명종 7) 표충사청동함은향완表忠寺靑銅含銀香垸, 금산사향로金山寺香爐; 간결하고 균형 있는 모양과 은사입銀絲入의 우아한 문양으로 유명 1214년(고종 1) 건봉사乾鳳寺 동제은상감향로銅製銀象嵌香爐, 1344년 봉은사(奉恩寺) 소 - 19 - 장 청동루은향로靑銅縷銀香爐, 1346년 동제은입사향로銅製銀入絲香爐; 고려 금속향로의 대표 작품, 주조기술 매우 우수 1098년(숙종 3) 은병銀甁; 일종의 은화 주조, 통용. 당시의 정교한 기술과 세련된 야금술 이 매우 뛰어났음 1401년(태종 1) 김해·청도 등에서 각각 은을 채취해 보았으나 성과 얻지 못함, 원 기술자 초빙 실패 1413년 각 도 감사로 하여 수령관首領官 파견, 채방사採訪使와 함께 도내의 금·은 산지 를 탐사하도록 지시; 태종·세종대에 광산개발 이루어짐 은 산지; 평안도의 태천·운산, 황해도의 곡산·불산·서흥, 경기도의 시흥, 경상도의 안동·청 도· 김해 등지 가장 유명한 곳 1430년 금·은의 사대세공事大歲貢 면제; 광업개발의 소극화 정책이라는 부작용, 귀금속의 취련·가공기술에서 뿐만 아니라 제련기술마저 후퇴하는 결과 1503년(연산군 9)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 단천의 금·은·납 광맥인 연철鉛鐵에서 은을 분리하는 새로운 은의 제련법 발명 단천은 은 산지로 변모, 영흥 등 많은 납 산지에서도 은을 제련할 수 있게 됨 단천은광 채굴문제; 공조판서 정미수鄭眉壽 민채안民採案 제시, 1503년 납세채은제納稅 採銀制 기초한 민채民採 허용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 폐정을 개혁하는 조처의 일환, 단천은광도 폐쇄 1516년 중종 때 군사 재원 조달을 위해 단천은광 재개, 중국이 공은貢銀을 재촉시킨다 해 다시 봉쇄 자국산 은의 생산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 광산은 봉쇄, 1539년 이후 일본 은의 유입 임진왜란 후 은산銀山 민영民營 다시 허가 1651년(효종 2) 주화鑄貨정책 재개; 주화재료로서 은이 곳곳에서 산출, 은산 채굴장인 은 점銀店 허가, 처음으로 세수함(設店收稅) 관영·민영으로 반전 거듭, 숙종·영조에 이르기까지 쇠퇴일로를 걸어 폐점하는 곳이 늘어 남 근대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은을 공업적으로 생산; 1915년 평안남도 진남포제련소 비철 건식제련공장 건설 3. 세계 은의 역사 은화는 기원전 6세기 리디아 왕국에서 처음 제조, 그리스와 로마로 계승 의학의 시조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은이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성질 있음을 기 록 페니키아인들은 물, 포도주, 식초를 은제 용기에 보관하여 부패되는 것을 막음 중세에 다시 재발견되어 음식과 물을 부패되지 않도록 저장, 화상이나 상처 처치에 사용 신항로 개척 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량의 은 유입, 금과 은의 가치 폭락(가격 혁명); 통 화로서 유통이 가능할 만큼 가치가 적절하게 자리 잡게 된 은이 세계 경제를 주도하기 시작 - 20 - 은은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유입, 인도의 고아, 필리핀 마카오 등 유럽이 마련한 상업 거 점지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 결제 화폐로 사용 시작; 일본과 중국에 영향 동아시아에서는 회취법灰吹法,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수은아말감법(소금물과 수은 가열, 수 은 아말감 가열, 수은 증발) 연은분리법; 동아시아 경제 흔든 계기는 1533년 이와미(石見) 은광 기술 유입 세계 은 경제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다름 아닌 중국 중국은 최대의 은 제국; 은자銀子 화폐 18세기 유럽 주식, 지폐, 어음 등 신용 화폐의 유통 활발, 은 경제 다음의 경제를 준비( 산업혁명) 16세기는 대항해의 시대; 유럽은 신항로로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명나라 찾음. 유럽과 아 시아가 무역으로 연결되는 시대. 명나라는 은으로 조세를 통일한 일조편법一條鞭法 세계 최대 은광은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i; 대항해를 선점했던 포르투갈은 포토시 은을 싣고, 명나라로 와서 도자기와 비단을 빈 배에 싣고 갔음 일본도 동남아시아 믈라카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일본 물품을 팔고 은 수입 1526년 이즈모出雲 지역에서 은광 발견; 오우치大內 가문은 은광 옆에 산성을 쌓고 부富 의 원천으로 삼음, 몇 차례 공방 끝에 은광은 1562년 모리毛利 가문에 넘어감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戰國時代 통일; 모리 가문은 은광을 히데요시에게 헌납. 이와미 은광 생산량은 세계 1위 일본은 은 제련술에 관한 한 후진국; 매장량에 비해 떨어지는 품질과 생산량은 일본 광 업계의 난제 이와미石見 은광 발견; 상황 급변; 조선에 후추, 소가죽 등을 팔러왔던 일본 사절단이 양 질의 은을 가져와 면포와 교환 요청, 시전市廛은 왜은倭銀으로 가득 1533년 8월 5일; 하카다博多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谷壽禎가 종단宗丹, 계수桂壽와 함 께 은광에 와 회취법 시작(伴同國博多 宗丹及桂壽者 而來于銀山 始吹鎔鍵製白銀), 이와미 은광 발견 7년 뒤 조선의 첨단 제련법 회취법을 초빙 기술자 두 명이 와서 가르쳤다는 것 이와미 은광은 볼리비아 포토시를 제치고 생산량 세계 1위 은광 회취법은 다른 광산에 전파, 일본에 실버러시Silver-Rush 일어남 17세기 에도江戶 시대 초; 연간 생산량 150톤으로 전 세계 생산량의 1/3 조선왕조실록 기사; 유서종이 왜노倭奴와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鉛鐵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노에게 방법을 전습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하나이 다(1539년 8월 10일 『중종실록』) 유서종柳緖宗; 전주 판관 김해 있을 때, 이미 공직을 남용해 이익을 챙긴 죄가 많은 인 물. 일본의 은광석을 밀수입해 제련, 일본인에게 제련법까지 가르쳐줬다는 것. 중종은 " 저놈이 죽어도 좋으니,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하라"고 명했음. 배경이 좋았는지 유서종 은 전옥서 주부(교도소 책임자)로 강등, 4년 뒤 파직 조치도 없던 일이 됨 일본은 믈라카에 집단 거주지까지 만들어 포르투갈 상인과 무역 1543년 포르투갈 상인 태운 중국 상선이 일본 가고시마 다네가시마種子島 도착; 도주島 - 21 - 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 철포鐵砲 2정 구입 4. 우리나라 연은 분리법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와 오주서종박물고변 五州書種博物考辨 기록 은의 제련은 15세기 말 함경도 단천端川; 납광석을 사용하여 은을 제련, 분리하는 단천 연은법端川鍊銀法 처음 실시 은의 제련기술은 16세기부터 조선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행 생은生銀 채취; 용로鎔爐를 파고, 그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열화烈火를 쌓고, 용로 속 에 먼저 납 조각을 놓은 다음에 생은을 그 위에 깔아 놓고,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숯불을 피움. 그 위에 아름드리 소나무로 덮어 불을 일으키면, 납은 먼저 녹아서 아래로 내려감. 생은은 빙빙 돌아 용솟음치면서 녹아서 용화熔化되어 신구연수新舊鉛水가 교반攪拌. 갑 자기 표면 한가운데가 갈라지면서 은은 윗면에 모이고 연재鉛滓는 잿 속에 스며듦. 여기 에 물을 뿌려 연판鉛版이 응고하면 집어내고, 다시 잿 속에 스며든 연재를 용로에서 녹 이면 재는 없어지고 납만 남음 조선 특유의 방법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제련법과 다른 점이 많지만, 회취법灰吹法이라는 것은 같음; 제련된 단천 은은 중국 은이나 일본 은보다 순도가 훨씬 높았음 납 광석에서 은을 효율적으로 분리 추출하는 새로운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은은 금과 함께 오래전부터 귀금속 대우 받음, 지금처럼 통용되기 전까지는 많은 제약 사항 먼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상태의 은은 자연 상태의 금보다 양이 훨씬 적음; 다른 금속과 뒤섞인 광석으로부터 순도 높은 은을 뽑아내야 함, 정련 과정이 다른 금속 들에 비해 상당히 까다로움 김감불과 김검동이 개발한 연은분리법은 함경도 단천에서 많이 채굴되는 납광석으로부터 순수한 은을 제련해 내는 방식; 원래 광산에서 채굴되는 은광석에는 은뿐만이 아니라 다 량의 납도 포함. 때문에 새로운 은 제련법을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이라 함 먼저 무쇠 화로 안에 매운 재를 바른 다음 납광석 덩어리를 채움. 화로 전체를 질그릇 조각들로 덮고 그 위아래를 강한 숯불로 달구면, 납이 먼저 녹아 아래로 내려감. 계속 센 불로 열을 가하면 마침내 은도 천천히 녹음. 갑자기 표면이 갈라지며 은만 위로 모이고, 납은 재 속으로 스며듦. 이때 물을 뿌리면 은이 응고되면서 납과 분리됨. 다시 재 속으로 스며든 납에 열을 가해 재 없애고 납도 분리할 수 있음 단천연은법은 은과 납의 녹는점·끓는점의 차이와 녹아 있는 상태의 비중 분리를 이용한 건식 제련법의 일종, 단천연은법으로 질 높은 은 광석이 많이 채굴되던 함경도 단천은 조선 제일의 은 산지로서 이름을 떨침, 단천연은법은 당시 유럽이나 중국보다 뛰어난 방 식, 전 세계에 내놓을 만한 훌륭한 세계 최고 은 제련 기술 1637년 간행 명나라의 학자 송응성의 저술 천공개물天工開物에 단천연은법과 비슷한 은 제련법이 소개;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 일본도 단천연은법 몰래 수입 일본은 17세기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약 30% 정도를 생산, 부강한 나라; 16세기 중엽 조 - 22 - 선의 은 제련기술을 몰래 수입했기 때문; 김감불과 김검동이 단천연은법을 개발한 이후 중종 때 어숙권이 저술한 패관잡기稗官雜記; ‘왜인들은 처음에 납으로 은을 만드는 방법 을 몰라 연철만 가지고 왔는데, 중종 말년에 어떤 은장이가 몰래 왜인에게 그 방법을 가 르쳐 주어 이때부터 왜인이 은을 많이 가지고 왔으므로, 서울의 은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는 내용의 기록 조선에서는 이후 단천연은법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움 조선 헌종 때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834년 저술한 과학기술서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 書種博物攷辨』에서 단천연은법과 비슷한 은 제련법을 소개, 이 기록도 중국 송응성이 지 은 『천공개물天工開物』을 통해 역으로 다시 이규경에게 전해졌을 가능성 은의 제련 방법; 염화법鹽化法, 혼홍법混汞法, 청화법靑化法 등 오늘날 은광을 처리 청화 제련 방법 -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