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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이 마태복음을 이제 이렇게 읽고 이해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어떤 복음서를 읽더라도 그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던져야 할 여러가지의 질문들이 있지만 그 중에 한 두가지를 간략하게 좀 저희들이 던져보고 좀 생각해 본 다음에 본문에 어떤 마태복...

저희들이 마태복음을 이제 이렇게 읽고 이해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어떤 복음서를 읽더라도 그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던져야 할 여러가지의 질문들이 있지만 그 중에 한 두가지를 간략하게 좀 저희들이 던져보고 좀 생각해 본 다음에 본문에 어떤 마태복음의 세계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요 먼저 여러분들 이런 질문을 가져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보금소란 어떤 종류의 책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금소의 장르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글을 읽든지 그 글의 장르를 생각하며 읽습니다. 시는 시로 읽고 소설은 소설로 읽죠. 수필은 수필로 읽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보금소는\... 어떤 종류의 책일까 그런 것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혹시 시라고 생각하신 분 계시나요? 아니면 편지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그럼 소설인가요? 그러면 혹시 여러분들 복음서가 역사서라, 역사책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읽으신 적은 없으신가요? 이건 조금 고민스럽죠. 역사책인가 아닌가 아니면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서를 여러분들은 연대기라 생각하시는 적은 없나요? 그래서 복음서를 읽을 때 연대기적으로 읽으려고 하는 그런 선입견이나 시도를 해 보신 적은 없는지요? 적지 않은 분들이 복음서를 연대기적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연대기적 순서를 매우 중시하고요.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굉장히 큰 어려움들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연대기적으로 복음서 안에 잘 맞지 않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대기는 아닌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복음서란 어떤 종류의 장르에 속할까? 오늘날 학자들은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딱 이거다! 라고 결론을 내리지는 못합니다. 가장 근접한 그런 문학장르 하나를 제안하는데, 그건 무엇인가 하면 전기, 전기 중에서도 위인전을 듭니다. 여러분들 그 위인전 중에 혹시 그 플루타르케 영웅전이라는 책 들어보거나 읽어보신 적 있나요? 플루타르케 영웅전.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그게 필 독서였습니다. 방학 때 읽으라고 학교에서 막 이렇게 나눠주고 그거 읽어가지고 독감 써가지고 가야 되고 그중에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이 있었는데요 그 플루타르크가 언제의 인물인지는 전혀 생각을 안 했었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바로 이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에 로마의 전기작가였습니다 그니까 복음서의 문학적 패턴과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이 상당히 맞다 있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는데요 이 플루타르크가 전기문학에 대해서 이런 글을 씁니다 알렉산더 대제의 전기를 쓰면서 1장 1절에서 나는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전기를 쓴다 이 말은 역사와 전기는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구분이 되는가? 전기란 마치 화가가 한 인물의 특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 인물의 얼굴 그 중에서도 두 눈을 표현하는 데 집중할 뿐 몸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인물의 마음을 엿보게 해주는 측면들의 더 많은 시간을 하려 하고 내가 기술하는 인물들의 생애를 묘사하는데 이것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양해해 주기 바란다 역사 기술과는 전혀 다른 패턴으로 내가 전기를 쓰겠다 근데 전기를 쓰는 데 있어서 내가 취할 방식은 마치 화가가 한 사람을 그릴 때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자세하게 전체를 묘사하기보다도 온 몸 중에서도 특별히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얼굴이고, 얼굴 중에서도 어디에 집중한다고요? 두 눈에 집중한다 사실 아이들이 사람 그리는 거 보면 되게 동그라미 그려놓고 팔다리 조그맣게 그려놓고 거기에 두 눈 딱 그리고 입 그려놓으면 사람이 되죠 눈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사람을 인식할 때 저 사람은 어떻게 생겼다 할 때 눈을 보면서 그 눈에서 그 사람의 댐 댐이를 그 특성을 찾는 그게 어린아이들의 모습인데 화학아들도 그렇고 그런데 전기문학을 쓸 때도 그런 방식을 내가 활용하겠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요 여러분들 우리가 마태보금 공부하지만 마가보금 같은 경우를 보면 더 특별한데요 마가보금 1장 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금의 시작이다 라고 한 다음에 예수님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 한마디도 하지 않냐고 곧바로 세례자 요한의 얘기를 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얘기, 광야 이야기 그리고 갈릴리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생애를 33년 정도라고 본다면 처음 30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아요. 그렇죠? 몸을 그리는데 33년을 그려야 역사적으로 잘 기술이 되는 거죠. 근데 전기는 그렇게 기술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33년은 다 생략해버리고 3년에 집중을 합니다 근데 3년이 얼굴이라고 한다면 그 얼굴 중에서도 어디에 집중을 한다고 했죠? 두 눈에 그러면 마가는 그 3년의 기간 중에서도 어디에 집중을 할까? 조금 있다가 제가 마가보금의 구조를 잠깐 보여드릴 텐데 거기서 두 눈이 무엇이구나 보금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기술해 나갈 때, 복음서를 기술해 나갈 때 얼굴은 무엇이고 얼굴은 3년 그 공생의 기간이라는 거 우리가 알 수 있죠 그런데 그 중에서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 이게 전기작가들의 기술 방식과 매우 유사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기를 쓰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쓸 수 있는데요 특별히 복음서는 연대기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가 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재하는 분들이 보험서를 기계적인 연대기로 생각하고 모든 게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 되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많은데 과연 그런가? 이 세기 초에 파피아스라는 그런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 있었는데요 파피아스는 마가 복음의 기술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마가는 주님에 의해서 말하여 지고 행하여 줬던 것들을 정확하게 하지만 순서대로는 아니게 기록하였다 우리는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정확하다고 얘기할 것 같은데 파피아 쓰는 마가 복음의 기술이 정확하기는 한데 순서대로는 아니다. 이게 전기 기술 방식, 보금서 기술 방식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보금서 조자들은 연대기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웠어요.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배열해서 예수 그리스대의 보금을 누가 읽어도 일목여연하게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이 아니라 그것을 굉장히 과감하게 재배열을 해서 한눈으로 봐도 아 이게 크리스도의 복음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게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이 연대기적 기술,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을 하는데 관심이 없었다는 점 꼭 거기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은 한 예를 들어서 우리가 좀 볼까요? 여러분들 예수님의 시험 받으신 사건이 마태보금, 마가보금, 누가보금, 세보금수에 있는데요 마가보금에는 구체적인 시험의 내용은 나타나지 않아요 마태와 누가에 세 시험이 나열되고 있는데 그 시험의 순서가 어떻게 되어있나 한번 비교해 보신 분 계신가요? 둘이 어떻게 어떤 순서로 돼 있나 비교해 보신 분은 아마 이런 고민을 했을 거예요 마태 봄 4장 1절부터 11절과 누가봄 4장 1절부터 13절에 보면 시험 이야기가 공이 기술 되는데 마태 봄에는 이런 순서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경배하라 근데 누가봄의 순서는 어떻게 돼 있나 돌로 떡을 만들어라 경배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어때요? 순서가 같나요? 다릅니다 우리 이렇게 다르면 틀렸구나 이렇게 다름과 틀렸다는 것을 똑같이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건 굉장한 오류입니다 잘못이에요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이고 틀린 것은 오류인 거예요 그런데 보금서 저자들이 만약에 연계기적 기계적인 연계기를 쓴다라고 한다면 이런 순서가 다를 때 틀렸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우리가 확인했듯이 보금서 저자들의 관심은 기계적인 연계기를 쓰는 게 아니다 순서에 얽매이지 않는다 라고 했다면 순서와 다르다에서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판단이 되겠죠 보금서에 보면 이런 순서의 차이들이 굉장히 많이 나타나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있지? 차이가 있으라고 4명이 쓴 거예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금서는 그러면 뭐 자기 맘대로 가공해서 이 얘기를 기술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는데요 보금서의 역사성입니다. 근데 이에 대해서 누가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에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준 그대로 매력을 저술하려고 부스듬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라고 했는데요 이 자세히는 아까 우리가 살펴봤던 정확하게 라는 말과 일치를 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단어이고요 아까 파피아스가 말했던 정확하게가 바로 이 자세이와 같은 아크리보스라는 단어이고요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가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더니 할 때 이 차례대로 하니까 아 이게 역사적인 순서대로구나라고 오해하는 경우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근데 이 차례대로라는 단어는 헬라우로 카덱세스라는 단어인데 이 카덱세스는 차례대로라는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건 뭔가 하면 질서 정연하게, 일목 요연하게 이런 의미도 있어요 여러분들 영어 단어의 order라는 단어가 순서도 있지만 질서라는 의미도 있잖아요 바로 카덱세스라는 단어가 그런 두 가지의 의미가 다 가능한 근데 아까 분명히 우리가 살펴봤듯이 보험서 조자들은 보험서를 쓸 때 기계적인 연대기적으로 쓰지 않았어요 역사적인 순서대로 쓰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여기서의 카덱세스의 의미는 차례대로보다는 질서 정연하게, 일목 요연하게 누가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험이 무엇이다 하는 것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질서 있게 썼다 우리가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뭔가 하면 보금서는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대충 쓴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미루어서 정확하게 쓰려고 했다. 그래서 보금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의 역사성은 우리가 충분히 신뢰할 만한 그런 글들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한편으로 이야기합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보금서 저자들이 보금서로 얼마나 과감하게 연대기를 좀 뛰어넘어서 질서정연하게 기술을 했던가를 보면 마가보금을 한번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요한 보금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몇 번이나 오르락 내리라고 하시죠? 최소한 세 번입니다 최소한 세 번이에요 요한 보금이 모든 예루살렘 방문을 다 기록했다 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자, 적어도 세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사실상은 예수님 사역 초기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잖아요 그런데 마가는 그리고 다른 공간보금서 저자들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을 어떤 식으로 기술을 하는가 보면요, 마가는 그의 보금서를 크게 세 단계로 기술을 합니다 3단계로 그래서 제 1막 제 2막 제 3막 이렇게 1막 2막 3막으로 구분을 하는데요 막이라고 하는 것은 배경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래서 1막은 3년 넘는 기간 예수님의 공생의 대부분의 시간이 1막에서 기술되는데 장소가 어디냐? 놀랍게도 갈릴리에만 머물고 계셔요 한 번도 예루살렘에 가시질 않습니다 계속 갈릴리에 계셔요 그럼 산막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막은 갈릴리, 3막은 예루살렘 그러면 1막과 3막을 연결하는 제2막은 무엇일까?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여행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여행이 제2막의 핵심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에서 예루살렘이 올라가는 목표가 무엇인가?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뭐하러 가신 것이죠? 십자가를 지러 가셨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가 아까 말씀드렸던 두 눈이에요 두 눈 보금서 저자는 마가는 그리고 마테도 누가도 그의 보금서의 전체 흐름을 사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예루살렘에서 지게 될 십자가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십자가 주제는 마가보금의 경우에는 제3막 예루살렘에서 갑작스럽게 나오지를 않습니다 여행이 시작될 때 제2막 빌리베 가이사리아에서 주는 그리소시입니다라는 신한 고백이 잇자고 바로 인자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라는 예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있는 이야기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제2막의 시작부터 10자가 죽음이 핵심 주제예요 그 주제를 처음 시작했을 때 빌리베 가이사리아에서 이제 이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요 올라가는 중간인 갈릴리아에서 그리고 이루살렘이 다가온 열이고에서 재차재차 세 번이나 예수님의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루살렘에 도착해서 그 이루살렘에서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마가에게 있어서 모든 보금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그 보금서의 얼굴에 두 눈은 어디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십자가에 맞춰져 있다. 십자가의 보금인 것이에요. 마가보금은 십자가의 보금.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틀을 마가만이 아니라 마태도 우리가 살펴보게 될 마태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보금의 관심도 사실은 결국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에 맞춰져 있습니다. 자 이렇게 보금서란 무엇인가를 우리가 간략하게 좀 정리해 봤고요. 그러면 또 한 가지 던져봐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럼 뭔가 하면 보금서가\... 몇 권으로 되어 있죠? 4권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권이 아니라 4권이다. 여러분들 혹시 보금서가 한 권이면 더 좋겠어요? 4권이면 더 좋겠어요? 한 권이면 참 좋겠어요. 복잡하지 않으니까 그냥 그대로 그냥 하면 되니까. 그런데 보금서가 4권이다 가보니까 아까 순서부터 막 복잡하잖아요. 시험 받는 순서 그 간단한 것도 달라요. 이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야? 고민이 생깁니다. 다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고민을 던져줘요 그래서 단순하고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분들은 보금서는 하나면 참 좋겠다 사실 여러분들 교환해보면 타티안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타티안은 네 권의 보금서가 주어졌는데 그 네 권을 하나로 묶어버렸어요 그래서 디아 테사론이라는 또 하나의 보금서를 만들었어요 평신도들이 4권이 있으니까 너무 복잡이 한단 말이죠 그래서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냥 1권으로 묶자 누가 봐도 그냥 일목요연하게 이것만 읽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니죠 사실 타티아는 성령께서도 못하신 일을 했네요 성령께서는 4권을 주셨는데 1권으로 묶었으니까 근데 만약에 정말 성령께서 교회에게 1권의 복음서가 4권 보다 더 유익하다 하면 몇 권을 주셨겠어요? 한 권이 더 유익하다 라고 성령께서 생각하셨다면 몇 권 주셨겠어요? 당연히 한 권을 주셨겠죠 그러나 한 권이 아니라 좀 불편한 데도 불구하고 복잡한 데도 불구하고 네 권을 주신 것은 교회에 네 권의 보금서가 있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라고 네 권을 주셨겠죠 그런데 이런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네 권의 보금서를 주신 목적이 뭐냐? 어떤 적극적인 목적이 있을 것 아니에요. 왜 네 권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마도 보다 풍성한 보금의 의미를 교회가 깨닫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으로 보이는데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간단하게 여러분들 주일날 성가대가 있는 교회에서는 성가대를 성가를 할 때 찬양을 부를 때 몇 부로 찬양을 하죠? 4부 로 하죠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이렇게 4부로 합니다 4부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음이 언제나 똑같나요? 박자가 언제나 똑같나요? 때로는 가사가 항상 똑같나요? 아니에요 음은 당연히 다르고요 그리고 때로는 박자도 달라요 그런가 하면 때로는 가사도 다릅니다 그렇죠? 그리고 어쩔 때는 그냥 소프라노만 쭉 나갈 때도 있고요 어쩔 때는 소프라노 엘토만 나갈 때도 있고요 테이너베이스는 가만히 있고 그렇죠? 각양각색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부 성가를 잘 연습해서 준비를 해가지고 주일날 예배 시간에 찬양을 하면 성도들이 끝난 다음에 뭐라고 반응을 해요? 어떤 분들은 막 박수도 치고 어떤 분들은 아멘하고 할렐루야 하고 교회마다 다르겠지만 반응이 아주 열렬합니다. 물론 잘했을 때 잘 화음이 맞춰가지고 찬양을 했는데 그거를 한 사람이 듣고 아 골치 아파 왜 이렇게 다르게 하는 거야 이런 사람은 제가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음악을 연구를 안 했더라도 특별히 공부를 안 해도 그냥 사업으로 잘 맞으면 그냥 조화해요 조화의 특별한 측면입니다. 달라도 조화를 이룬다는 거예요 그리고 훨씬 더 풍성한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거예요. 보금소도 마찬갑니다. 한 권의 보금소 안에 있는 것보다는 네 권의 보금소가 있으므로 말며 아마 교회에게 훨씬 더 풍성한 보금의 의미를 다양하면서도 조화롭고 통일성 있게 제시하는 것. 그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네 권의 보금소를 주신 이유요, 목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이 네 권의 보금소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려면 아까 소프라노, 알토, 테네베이스가 화음을 잘 이룰려면 각각의 음과 박자를 잘 지켜야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강렬까지도. 그렇죠? 그래야 조화가 되는 거예요. 근데 소프라노가 알토가 있는데 알토에 좀 서툰 사람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소프라노가고 알토하는데 헷갈린데서는 어느새 뭐를 따라가고 있어요? 소프라노가 따라가고 있어요. 베이스도 그래요. 그러면 사업으로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혼돈이 되는 거예요. 그런 거를 지휘하는 지휘자로서는 애가 타는 거예요. 저거 아닌데 지금 저걸 얘기하면 어떡해 서로 혼합이 되어버리면 안 돼요. 각각의 특별한 독특한 음과 박자를 잘 살려야만 되는 거죠. 네곤의 보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네곤의 보험사가 유익하려면 각각의 보금서의 특성을 따라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보금, 마태보금답게 마가보금, 누가보금, 요한보금 그 각각의 보금서답게 이해하는 게 필요해요 마태보금을 설교하면서 내가 마가보금을 하는지, 누가보금을 하는지 아무런 생각 없이 하고 있다면 알토가 소프로나 따라가는 거나 똑같습니다 마태보금을 설교할 때는 마태보금의 특성을 잘 살려서 마가보금 누가 보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앞으로 10주간에 걸쳐서 마태보금을 공부하게 되는데요 이 10주간에 공부가 끝날 때쯤에서는 아, 마태보금의 특징은 이런 거구나 여러분 짜장면 짬뽕 맛이 구분이 안 되시는 분 있으신가요? 그 특성을 모르신 분 있어요? 짬뽕은 무슨 색이에요? 빨간색 짜장은 무슨 색이에요? 까만색 맛도 국물이 있고 없고 맛도 각각 아시잖아요. 그렇죠? 이걸 설명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설명하려고 하면 웃기는 거예요 육의 양식은 이렇게 우리가 잘 구분합니다 짜장 짬뽕 우동 울면 네 종류의 중국 음식은 잘 구분을 하면서 다 면이잖아요 그런데도 면이니까 그냥 이거저거 다 짬뽕이 아니에요 짬짜면을 섞어서 주는 게 아니라 짜장하고 짬뽕하고 따로 따로 두 개를 줘요 그렇죠? 두 맛을 고유하게 봐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영의양식인 4권의 보금서 각각의 특징을 잘 살려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그렇죠. 잘 살려 읽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이제 4권의 보금서의 특징을 한꺼번에 다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 이번 학기에는 10주간에 걸쳐서는 마태보금에 집중해서 살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F!! 이제 학자들이 궁금해합니다. 마태부금의 특성이 뭐냐? 짜장면은 색깔이 까맣고 달달하고 맛이 있는데 국물도 없이 걸쭉하니 또 짬뽕은 얼큰하고 빨갛고 국물도 있고 몸살 균일 있을 때 한번 쫙 들키면 그냥 몸이 쫙 풀리는 그런 특징이 있다는 거 우리가 잘 알잖아요. 그럼 마태부금의 특징은 뭐냐? 마테몰을 쫙 읽으면 어떤 기분이 날까? 짜장면의 기분이 날까? 짬뽕의 기분이 날까? 그 기분이 무엇일까? 어떤 특징이 있을까? 그것을 오늘 우리가 첫 시간에 그 성격을 전체적으로 한번 정리해보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이 본문 안에 들어갔을 때 과연 어떻게 드러나는가는 차 안차니 하나하나 확인해 나가게 될 거고요 학자들은 마태국음의 특징을 얘기할 때 먼저 주제적인 관점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마태의 관심사, 마태의 관점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그것은 성취라는 주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성취하면 무엇의 성취를 얘기할까요? 구약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구약이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게 이제 성취 주제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성취 주제는 마테만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마테 말고도 모든 신학의 저자들은 이 성취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테보금에 특별한 관심이 성취다. 말의 의미는 뭐냐? 그것은 마테만 성취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마테는 특별히 더 성취에 관심을 집중한다. 더 관심이 있다는 말이에요. 다른 복음서나 신학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더 성취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다. 그럼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요. 마테복음연은 다른 보금서나 신약성경 전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구약의 인용방식이 있습니다 뭔가 하면 성취 주제를 부각하는 도입구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성취 형식 도입구라고 하는데요 제가 노트북을 바꿨더니 제 노트북이 아니라서 지금 헬라와가 다 깨져서 나와서 죄송합니다 제 노트북이 여기 화안이 잘 안된다고 해서 그러니까 헬라와는 그냥 오늘 무시하시고요 사실 헬라와 나와 봐야 도움이 안되는 분들이 꽤 많으실 거예요 자 이걸 번역을 제가 그래서 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 되도록 하기 위합니다 이런 마테만의 고유한 성취 도입 형식구가 10번이나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이 형식구는 마태복음에만 있는데 10번이나 반복된다. 그러면 마태가 이 성취라는 주제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형식구 자체도 독특한데 그게 10번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마태의 성취에 대한 관심사가 다른 보금서나 신약의 저자보다 얼마나 특별한가를 알 수 있고요 이와 유사한 도입구가 신약 성경에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보금에 보면 이런 성경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압니다 라는 아주 간략한 마태보금의 도입구에 비하면 아주 간략한 그러나 성취라는 주제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도입구가 4번 나타나요 그러니까 요한도 구약의 성취라는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마태는 훨씬 더 전문적인 도입구를 일관성 있게 10번이나 반복한다라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고요 그런데 성취에 대한 마태의 관심은 이런 성취 도입 형식구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한번 예를 그래도 읽어보는 게 좋겠죠 마태공 1장 22절 23절을 저희가 보면 성취 형식 인용구의 형태가 어떻게 되는지 번역은 제가 여기에서 제시한 것과는 좀 다르습니다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하려 하신 말씀을 이루려, 이건 성취하려 라고 좀 바꿔서 읽겠습니다 성취하려 하시미니 이루시되 보라 천여가 잉태해야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인만웰이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마리에게 천여 잉태한 이 사실은 2사에서 7장 14절에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라는 사실을 마한테는 아주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강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건은 구약을 성취하는 사건이다 마테만이 이런 식으로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테는 이런 성취형식 인용꾸만이 아니라 5장 1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선교의 목적이 무엇이냐를 5장 17절이 밝히는데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 여기서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르칩니다 구약성경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려 하미로다 했는데 아까 1장 22절에서 우리가 읽었던 이루려라는 동사, 플레로 동사가 여기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장 22절에서는 이루려 하고 여기서는 완전하게 하니까 두 단어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어 보여요? 안 보여요? 전혀 안 보이죠 근데 마트에는 똑같은 단어를 쓰고 있어요 이 개념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10번의 성취 형식 인용 꿈 아니 아니라 예수님의 선교의 목적 그리고 구약과 예수님의 관계를 얘기하는 이 부분에서 구약을, 율법을 성취하려 합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성경의 완전하게를 성취하려라고 좀 메모를 좀 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의 핵심 5위인데 번역이 매우 안타깝게 아쉽게 번역이 됐습니다. 성취하려 함이로다. 그러니까 이 선언은 마태 복음에만 있어요. 구약과 예수님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 말씀이 다른 보험서는 물론이고 다른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과 구약의 관계를 너무나 분명하게 성취적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태의 특별한 관심사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자, 아까도 얘기했듯이 성취라는 주제는 구약성경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성취라는 주제를 얘기하려면 구약성경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마태는 어떤 다른 보험서보다도 이 구약성경에 대한 관심 특히 인용이나 언급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면 동일한 이야기 있는데 그 이야기에서 마태는 어떤 부분에 더 많은 관심과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인데요. 마가공 2장 23절부터 28절에 보면 안식일의 밀밭에서 밀을 까먹는 그런 제자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바리세인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동일한 이야기가 마태 보면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 이 하늘색 자 그 부분이 마태 복음에만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 속에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그 핵심 어휘들이 있죠. 5절에서는 율법에서 읽지 못하겠느냐 6절에서는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7절에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니 하노라 호세하세 6장 6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자 율법 성전 선지서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뭡니까? 다 어디에 있는 거예요? 구약에 있는 거예요 구약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안식일 성취를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마가나 누가에는 이 내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마태는 특별히 이 어떤 논점을 얘기할 때 구약과 연관해서 그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구약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그 구약을 예수님이 성취하셨다는 것이죠. 율법도 성취하셨고 성전도 성취하셨고 이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냐고 하는 예언, 말씀도 성취하신 분이시다. 성취 주제를 강조하고 있죠. 자 이런 구약에 대한 관심은 여기만이 아닙니다. 계속되는데요. 한가지만 더 예를 들면 복음서를 예수님의 사역을 처음 소개하는 그 시점에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사역이 처음 소개가 돼요 마태복음의 평행골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똑같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 갈릴리에 오셨다 똑같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17자래 보면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여 이르시되 해계하라 천국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복음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갈릴리에서 이 복음을 선파하셨다 했는데 마태아는 막아야 없는 내용을 이렇게 하늘색 빨간색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근데 빨간색의 내용을 보면 뭔가 역시 이사야서의 인용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왜 갈릴리냐, 예루살렘에 가서 사역을 하시지 왜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시느냐 라는 사실을 구약의 성취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냥 가신 게 아니다. 구약에 이렇게 예언을 하셨는데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셨다. 이게 마태의 성취에 대한 관심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마태는 구약에 대한 관심이 어떤 다른 보험소 저자보다도 많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성취에 대한 관심사 때문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좀 정리를 해봅니다 그리고 성취에 대한 마태의 관심은 또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이 되는데요 그건 뭔가 하면 마태의 보험이 굉장히 풍성하게 나타나는 구약에 대한 이해의 해석 관점입니다 그럼 모형론 입니다 모형론, 모형론이 뭐냐? 모형론을 전혀 들어보시지 못한 분들은 오늘 그 개념을 한번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모형론이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신실하게 진행된다는 신념에 기초해서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와 예수님 사이의 연관성을 인식합니다 구약의 인물들 사건들 제도들이 있는데 그것과 예수님의 관계를 연관성을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둘 사이의 관계를 모형과 실체 관계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형은 실체를 내다보며 예언을 하고 실체는 그 예언을 성취합니다 모형은 예언을 하고 실체는 성취한다 그래서 모형러는 기본적으로 예언의 성취라는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오용론이란 구약의 예언에 성취다. 누가 성취하시는가? 예수님께서 성취하신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보면 하나님의 계시의 그릇이 이렇게 있다면 하늘색으로 물이 지금 차 있는데요. 그 계시가 그만큼 차 있다는 말이에요. 구약의 계시입니다. 궁극적으로 온 그릇에 다 차야 되는데 구약은 이만큼의 게시가 차있다는 거예요 그 구약의 게시 안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는데 모형론과 관련해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물, 사건, 제도 인물이라면 여러 인물들이 있죠 모세도 있고, 다윗도 있고, 솔루문도 있고, 연화도 있고 다양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이 하나의 모형적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사건도 있습니다 사건은 출협사건이라든지 여러 사건들이 들어있겠죠 제도, 제도는 성전제도라든지 할래제도라든지 다양한 제도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언가를 내다본다는 거예요 모형으로써 누군가 실체이신 예수님을 내다본다 인물도 사건도 제도도 예수님을 내다보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형과 실체 사이에는 두 가지의 관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사성이 있고요 유사점이 있어요 그리고 또 동시에 차이점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모형론을 얘기할 때는 모형과 실체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가를 살피는 게 중요하고 그러면서 또 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살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모형론과 관련해서는 마태홈 1장 붙어서 굉장히 풍성하게 그 모형들이 나타납니다만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한 가지 부분은 12장에 나타나 있는 3개의 모형론입니다 12장의 모형론인데요 자 먼저 모형과 실체의 관계는 예언과 성취의 관계다라고 했고요 그래서 모형은 그림자의 역할을 한다면 실체는 실물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유사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는 점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세 개의 모형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1장 6절에 보면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성점보다 더 크니가 여기 있는이라 여기 보니까 성전과 예수님이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전과 예수님 중에 누가 더 크시다? 예수님이 더 크시다 실체가 당연히 더 큰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보다 크시다 그러면 모용론을 항상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라 했으니까 성전, 성전 제도와 건물, 성전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요? 하나는 건물이고 제도고 하나는 사람인데 둘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겠어요? 유사점이? 성전에 기능이 뭐죠? 예, 하나님께 예배를 하는 것이에요 그럼 왜 사람들이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죠? 그 이유는 성전에 누가 임제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에 임제해 계시죠? 지성소에 임제해 계십니다 그러면 성전이 하나님의 임제 자리라면 예수님은 어떠신가? 예수님은 아까 우리가 읽었던 1장 23절에 보면 인만웰이라 했는데 인만웰을 번역하면 그 의미가 뭐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임제 자리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거기가 예배의 자리라는 거예요.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 너희와 함께 있겠다. 두세 사람만 모이고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면 예배의 자리가 된다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둘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뭘까요? 차이점은 분명합니다. 성저는요, 일단은 장소적으로 제약이 되어 있어요. 어디에만 하나님이 임제해 계시죠? 지성소에만. 예루살렘 안에서 성소 안에서도 지성소에만 계세요. 지극히 제한된 장소에만 계세요. 그리고 그 지성소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누구나 들어갈 수 있죠? 아니에요. 제사장 누구나 들어가나요? 아닙니다. 누구만 들어갈 수 있어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어요. 대제사장은 아무 때나 들어가죠? 맘만 먹으면 들어가죠. 하나님 만나는 거 얼마나 좋아요? 아닙니다. 1년에 딱 하루. 한 번. 대속저일라예요. 지극히 제한되어 있어요. 지역적으로도 제한되어 있고 들어갈 수 있는 대상이 있었어도 제한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하나님의 임제 경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신가요? 아까 몇 사람만 모이면? 두세 사람만 모이면 누구든지 아무나예요. 대제사장만이 아니라 아무든지 두세 사람이 어디에 모이든지 지리적인 한계도 없어요 그리고 언제 임제하시는가 우리 28장 한번 보겠습니다 28장 20절 내가 너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인만웰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임제의 은혜는 언제 이루어진다고요? 항상, 항상 그러고 보니까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대상에 있어서 모든 제약이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그림자와 실물 모형과 실체 사이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니까 모형은 아무리 오래 있어도 아무리 많이 제사를 드려도 해내지 못한 것을 이 실체는 단번에 해낸 것 그게 히브리서저자의 모형론의 핵심입니다 근데 바로 이 성전 모형론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12장으로 다시 돌아가세요 12장 40절 보면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 닌회 사람들이 일어나 2세대 사람들을 정지하리리니 이눈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의하였으미거니와 요나와 예수님이 모형론적 관계를 갖는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엔 누가 더 크시다? 예수님이 더 크시다 그럼 먼저 요나와 예수님 사이에 유사성이 뭐냐부터 따져봐야 모형론의 의미가 드러나겠죠? 어떤 유사성이 있나요? 요나는 뭐였어요? 직책이 뭐였습니까? 선지자였죠? 예, 예수님도 사람들이 그리고 스스로도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로서의 공통점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3일 동안 어디에 계신다고요? 땅 속에 묻혀 계신다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거예요 요나도 죽었다 살아났고 그런데 예수님도 죽었다 살아난다 이 정도의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뭘까요? 차이점은 우선 요나는 죽을 뻔했는데 살아난 건데 예수님은 어떻게 해요? 진짜 죽었다 살아납니다 그리고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요나는 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죠? 불순종에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라 명령하셨죠? 니뇨로 가라 근데 어디로 갔어요? 반대 방향 다시 쓰러 갔어요 뱃속에서 그 사실이 발각이 됐고 뽑혔고 그래서 그 상황에서 요나가 죽지 않고도 살 방법이 없었을까요? 있었을까요? 있었어요 아 내가 나 때문에 이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니 뇌로 가야된 데 다시 쓰러가기 때문에 그런거니까 뱃머리를 잠깐만 니 뇌로 방향을 틀어주십시오 선장한테 부탁하고 하나님 제가 갑니다 저 때문에 이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렇게 해도 될 뻔했어요 하나님이 그러면 당연히 그래 그럼 빨리 가 이러셨겠죠 근데 요나는 어땠죠? 내가 죽으면 죽었지 어디나 안 간다 니 뇌는 안 간다 죽기까지 불순종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왜 땅속에 3일동안 묻히셨죠? 개쌤 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 하신 기도의 제목이 뭐였어요? 내 뜻대로 하지 마오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무엇을 위한 기도에요? 순종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순종하셨어요. 죽기까지 순종하셨어요. 이게 보영과 실체의 차이입니다. 게다가 그 결과도 달라요. 살아난 후에 요나는 누구를 구원했습니까? 니누의 백성들을 구원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일 동안 죽으셨다가 살아나시므로 누구를 구원하십니까? 온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까 모형과 실체란 굉장히 긴밀한 연관성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하게 되고요. 요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 끝으로 42절을 보면요. 심판대에 난방교황이 일어나 2세대 사람을 정주하리니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 써왔으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크니가 여기 있는이라. 이제는 솔로몬과 예수님 사이에 모형런입니다 둘 사이에 누가 더 크시다고요? 예수님이 더 크시다 그럼 솔로몬과 예수님 사이에 유사점은 뭐냐? 우리가 살펴보면 솔로몬은 모형이고 예수님은 실체이시니까 솔로몬은 직책이 뭐였습니까? 왕 예수님도 왕이십니다 굉장히 심일한 연관성이죠 근데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솔로몬은 누구의 아들이었죠? 다윗의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의 아들이라고 1장 1절에서 얘기하나요? 다윗의 아들이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었듯이 예수님도 다윗의 아들이십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로 하나의 그림자였다면 다윗의 아들의 진정한 목표는 바로 예수 크리스도시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긴 한데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거에요. 그의 내다보는 목표가 있었다는 거에요. 그 목표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3월 7장 14자라고 보면 다윗에게 솔로몬에 대한 약속을 하시죠. 그는 나에게 아들이고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된다. 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 세일에 받으실 때 그대로 그 예언이 성취되는 솔로몬의 모용적인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유사점이 또 있는데요.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는데 예수님은 지혜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혜도 불구하고 결과가 어땠는가? 솔로몬은 우상승배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탄과의 시험에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단 한 번도 사탄에게 굴복한 적이 없습니다. 우상에게 절한 적이 없어요. 끝까지 하나님만 성기는 진정한 하나님의 다위세 자손에 성취된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솔로몬과 예수님 사이의 모형론도 우리가 좀 정리해 볼 수 있고요. 이게 마태의 큰 관심사예요. 구약의 중요한 인물들과 사건들이 하나하나 제도가 다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됐다는 거예요. 그것들은 예언을 했고 그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가\... 되었다. 그런데 12장의 내용을 가만히 보니까 이런 요소가 좀 있어요. 구약의 삼중직이라고 보통 얘기하죠. 성전은 제사제도, 내지는 제사장, 요원하는 선지자, 솔로몬은 왕, 바로 예수님께서 이런 삼중직을 성취하신 분이시다 라는 점을 마태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리해보니까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정리하시지 않았더라도 무의식 중에 구약의 중요한 이 세 가지의 요소를 마태는 예수님께서 성취하셨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자 그리고 이제 이런 큰 관심사와 더불어서 마태 보면 또 중요한 핵심 주제가 하나 있는데요 그 핵심 주제는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전체적인 관점이 성취라면 그 성취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다 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 시간에 저희들이 살펴볼 시간은 없고 제가 산상설교를 강의하려고 할 때 그때 간단하게 하나님 나라는 한 학기 내내 몇 년 동안 강의를 해도 사실은 모자란 너무 큰 주제인데요 그러나 우리 강의 최소한 필요한 정도만 제가 산상설교 하기 전에 좀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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