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차 하이데거와 사피로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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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k Atlant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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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document discusses the philosophy of Heidegger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modern technology and philosophy. It explores the idea of "lost home" in the context of modern society, analyzing the implications of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advancements on human experience and values. The text examines the concept of existence in the context of Heidegger's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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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1889~1976)와 사피로(1904~1996) 1. 하이데거의 철학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1) 왜 하이데거가 문제가 되는가? 하이데거가 살았고 하이데거 자신이 파악한 시대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다. 이러한 시대 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다음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장미는 이유없이...
하이데거(1889~1976)와 사피로(1904~1996) 1. 하이데거의 철학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1) 왜 하이데거가 문제가 되는가? 하이데거가 살았고 하이데거 자신이 파악한 시대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다. 이러한 시대 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다음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장미는 이유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필 뿐이다. 장미는 그 자신에도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도 묻지 않는다. 하이데거, Der Satz vom Grund p.69. 장미는 이유 없이 핀다. 그러나 소위 과학기술 시대를 사는 우리는 항상 사물의 근거를 따져서 묻는 다. 우리는 장미가 왜 피는지, 어떻게 하면 장미를 더 아름답게 피게 할 수 있는지를 물으며, 이런 식 으로 근거를 파악하여 장미를 우리의 통제 아래에 두고자 한다. 그러나 근거에 대한 추구를 통하여 우 리는 정작 장미 자체는 보지 못한다.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빛을 발하고 있는 장미는 우리의 시야에 서 사라져버리고, 장미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만 우리 시야에 들어온다. 현대의 계산적 사고 속에서 사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상실하고 과학적으로 드러난 계산 가능한 조건들로 해체되어 버린다. 그러나 계산적 사고의 문제는 사물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삶에까지 파고들어 거룩 함의 종교와 가치의 윤리는 사라지고 삶은 분해되었으며, 나아가 인간조차 과학기술을 위한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 현대 기술 문명과 하이데거철학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고향상실’의 시대라고 보았다. 상실한 고향이란 무엇인가? 전광식의 고향이 란 책을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고향의 고(故)라는 문자가 ‘예스러움’ 내지 ‘오래됨’을 의미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처럼 고향은 우리가 적응하기에 바쁜 급변하는 세계가 아니라, 예스러운 안정된 삶의 세계를 가리킨다. 둘째, 고향의 고(故)라는 문자에는 ‘떠나온’이란 의미가 있기에 고향은 내가 떠나왔지만 그리워하는 추억의 장 소를 가리킨다. 셋째, 고향은 무엇인가 은닉되어 있고 순수한 삶의 세계를 가리킨다. 고향은 도회지처럼 노출된 때 묻은 공간 이 아니라 감춰져 있으면서 아직 순수성을 간직한 세계를 의미한다. 넷째, 고향은 자연을 압도하는 대도시와는 달리 자연에 안겨있는 아늑한 곳을 가리킨다. 이러한 고향이란 가 정의 연장이며 익명의 타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니라 사랑과 정 그리고 혈연적, 지연적 유대감과 서로에 대한 애정이 지배한다. 즉 하이데거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고향을 잃고 방황하는 시대 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대를 “세계는 황폐하게 되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 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가 황폐하 게 되었다’는 것은 현대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이 독자적인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계산 가능한 에너지로 취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들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려 는 인간들의 지배 의지로 인해서 우리로 하여금 경외심을 품게 하는 성스러운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 을 의미한다. ‘대지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뿌리박은 대지와 산하(山河)는 한갓 에너지 자원이나 관광자원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들이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은 개개의 인간들이 소비 산업과 정치에 의해서 조작되는 익명의 대중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 미한다. - 1 - 어떤 하나의 지대는 석탄과 광물을 내놓도록 닦달 당한다. 지구는 이제 채탄장으로서, 대지는 한갓 광물의 저장고로서 나타난다. 농부들이 이전에 경작하던 밭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의 경작은 키우고 돌보는 것이었 다. 농부의 일이란 토지를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자신의 성장력에 맡기고 그것들이 잘 자라도록 보 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토지 경작은 … 이제 기계화된 식품 공업일 뿐이다. 공기는 이제 질소를 내 놓도록 강요당하고, 대지는 광석을, 광석은 예컨대 우라늄을, 우라늄은 원자력을 내놓도록 강요당한다. 하이데거, 기술과 전향 중에서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우리는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지만 사물과 자연 그리고 인간들이 갖는 본래의 충만함과 생생함을 지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했고 망원경으로 한없이 멀리 있는 것까지 볼 수 있고 현미경으로 한없이 작은 것까지 볼 수 있으나, 정작 우리가 그 안에서 태어나서 죽는 ‘가까운 세계의 축제’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대지를 보지 못하며, 새 소리를 듣지 못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정보를 교환하는 황폐한 언어가 되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잃어버린 고향은 과학에 앞서는 근원적인 세계이며, 어떠한 신비한 세계가 아니 라 우리가 뿌리박고 있는 단순 소박한 자연의 세계이며, 우리의 지배 의지를 벗어버리고 순연한 눈과 마음으로 본 세계이다. 하이데거에게는 단순 소박한 자연을 망각한 채 인위적이고 복잡한 기술만을 추 구하는 우리 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궁핍한 시대다. 그러나 현대인은 삶의 궁극적인 지반을 상실하 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시대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대라고 자부한다. 하이데거는 우리 시 대의 최대의 위기는 이러한 오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오만 때문에 인류는 파멸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하이데거는 단순 소박한 자연의 세계를 ‘존재’라고 부르면서, 현대인들은 존재를 망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고 있다는 데 현대의 위험이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대에 철학의 사명은 망각된 존재를 상기시키고 이러한 존재 의 기반 위에 다시 고향을 건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 현대의 위기와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하이데거에 의하면 플라톤 이래의 서양의 형이상학과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은 ‘존재자가 존재한다’ 는 것의 의미를 ‘인간이 지각하거나 이론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해 해왔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의 의미를 ‘눈앞에 존재함(Vorhanden-sein)’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러한 존재이해에서 존재자는 우리가 언제든지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의 근거나 작용법칙을 통해서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중세 서양에서 존재자 전체는 ‘신의 피조물’로서 이해되었다. 신이야말로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근거이기에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신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 다. 따라서 중세에는 학문과 예술과 일상생활이 신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대 이래로 모든 존재자들은 신의 의지보다는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 법칙을 파악하는 것을 통해서 존재자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양의 역사는 이렇게 모든 존재자들을 우리의 이론적인 파악 대상으로 보면서 그것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갈 수록 강화되는 역사1)라고 한다. 1) 하이데거에 따르면 근대 이래의 현대 과학기술문명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을 기초로 가능했다고 한다. 자연을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하고 예측할 수 있는 연장적 사물로서 보는 데카르트의 해석이야말로 근대의 기술문명을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존재자들은 연장적인 사물(res extensa)로서의 세 계와 인식하는 자(res cogitans)로서 구별되며, 양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고 보았다. 인식하는 인간은 독자 적 목적을 갖고 있으나, 연장적인 사물인 세계는 그 어떠한 자체적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데카르트가 인간 과 자연을 철저히 분리시키면서 자연을 자체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 연장적인 사물로 본 것은 자연을 인간이 뜻 대로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데카르트적 자연관은 인간 자신이 전혀 자연에 속하지 않을 경우에만 인간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인간도 자연 속에서 태 어나서 그 안에서 죽는 자연적인 존재자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한, 데카르트적인 자연관이 지 배하는 상황에서는 인간마저도 과학에 의해 대상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이렇게 자연의 일부인 한, 우리가 자연 전체를 지배하려할 경우에는 우리 자신마저도 지배대상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인간의 행복을 위 해서 인간과 자연을 극단적으로 구별했던 데카르트의 자연관은 역설적이게도 인간마저 비인간적인 대상으로 환 - 2 - 하이데거는 서구의 역사를 규정해온 ‘눈앞의 존재’라는 존재 이해와 달리 ‘존재자가 자신을 열어 보 이면서(aufgehen) 우리에게 다가옴(angehen)’이라는 의미의 임재(Anwesen)이야말로 근원적인 존재이 해라고 본다. 이러한 근원적인 존재는 우리가 존재자를 시적으로 경험할 때 개시된다. 존재자들을 지 배하기 위해 존재자들의 근거나 조건을 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들에 대한 지배 의지에서 벗어 나 존재자들을 순연한 눈으로 보고 경험하면서 그것에서 발해지는 존재의 빛에 감응하는 것’이다. 다 음의 하이데거의 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숲은 가로누워 쉬고 있고 개울물은 급히 흐른다. 바위는 묵묵히 그렇게 서 있고 비가 촉촉이 내린다. 들녘의 논밭은 기다리고 샘물이 솟는다. 바람은 잔잔히 불고 축복이 은은하게 가득하다. 위 시는 우리 주위에 너무나 자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무심코 보아 넘겼던 단순 소박한 사물들에서 발하는 빛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그것들을 경이롭게 보도록 할 뿐, 우리에게 어떠한 과학적 정보도 주 지 않는다. 숲과 개울물, 바위와 비, 들녘의 논밭과 샘물 그리고 바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전혀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그전에 그것들에서 볼 수 없었 던 광채를 보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광채를 ‘존재의 빛’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한 존재는 우리 가 분명히 규정할 수 없는 무한한 의미로 충만한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시에서 존재자들 은 그 전보다 ‘더 존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동일한 존재자들로 머물면서도 우리가 그동 안 보지 못했던 존재의 빛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래 시 인이며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찬미와 음미의 삶을 살아야 함을 주장하는 것 이다. 인간이 시인으로 거주하지 않고 단순히 과학자나 기술자로만 존재하는 한,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항상 자신에 대한 불만과 불안 그리고 권태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불만과 불 안 그리고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그러 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에 대한 지배와 남용을 더욱더 추구 하게 되며, 소비와 향락을 더욱더 탐닉하게 된다. 그 결과 권력이나 소비 물자와 향락물자를 둘러싼 인간들 사이의 갈등은 그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존재자들이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 보이면서 임재하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어떤 특정한 존 재자에 대해서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이 그렇게 임재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 다. 즉 그는 인간 자신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가 은은한 빛 안에서 자신을 환히 드러나 있는 것을 경험 한다. 모든 존재자들이 ‘전체의 열린 터’ 안에서 자신의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러한 전체를 하이데거는 ‘근원적 의미의 자연’이라고 부르고 혹은 ‘존재 자체’라고도 부른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의 열린 터에 나아갈 때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충만한 깊이를 드러내면서 자 신을 개시한다고 본다. 이러한 존재의 열린 터란 특별히 신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태어나 고 죽어가는 삶의 터전인 바로 그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이다. 자신들의 고유한 존재의 빛을 발하고 있 는 자연은 가장 자명한 것이면서 가장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들을 자신들의 욕심에 따 라서 조작하고 지배하려는 인간들의 관심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인간의 지배력을 계속 강화하는 한, 즉 문명의 지반인 소박한 자연을 계속 망각한다면, 현대의 문명은 사멸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하이데 거는 경고한다. 원시키는 과학주의적인 입장과 이러한 입장에 의해서 지배되는 문명을 낳았다. - 3 - 2.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1) 사물과 도구, 그리고 예술작품 뒤샹의 샘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변기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1917년 뉴욕의 전시회장에 전시하려 했으나 전시회장 밖에서 전시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프랑스 퐁피두센터 현대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으며, 37억 달러를 호가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기성품 을 예술가가 일상적 환경이나 장소에서 갖고 와서 예술작품이라 선언하면, 예술작품이 되는가? 무엇이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과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런 의 문들을 정리해 보면 아마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 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통해서 살피고자 한다. '예술의 본질은 예술가에게 있고 예술가의 본질은 작품에 있으며 작품의 본질은 다시 예술에 있다' 라는 문구처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순환에 빠진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문제 삼는다. 전통적 견 해에 따르면 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활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은 예술작 품을 통해서다. 그런데 예술작품은 하나의 사물이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사물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소관이었다. 하이데거의 경우 '사물'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자의 본질을 형이상학적 사유 전통에서 찾기 거부하는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물음을 실제 예술작품, 즉 사물로부터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물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무(無)가 아닌 일반적인 존재자가 사물이다. 그러나 형 이상학의 사유 전통 내에서 사물에 대한 해석은 다르다.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하는 '형상+질료'의 결합 틀이 예술이론과 미학의 개념 도식이 되고 이 개념 도식이 근대 이후 형상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오면 서 형성된 형이상학적 '주체-객체'의 도식과 만나 서구 사회에서 사물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메커니즘 이 되었다. 이에 의해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존재하는 것을 도구로 생각하게 된다. '형상+질 료' 결합 틀의 근원은 사물의 본질이 '도구적 용도성'에 있다는 견해이다. 이 지배하에 있는, 예를 들 면 항아리ㆍ망치ㆍ신발과 같은 존재자는 어떤 것을 위해 제작된 산물로서 자연적 사물과 작품 간의 중 간 위치에 있다. 문제는 서구 사회가 이 도구 존재자에 대한 이해 틀을 모든 존재자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 틀로 간주 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 자체(사물)를 도구로 이해하는 것을 '사물에 대한 습격' 이라 명명했고 이 '도구적 용도성'을 벗겨낸 것을 '사물'이라고 한다. 도구는 유용한 것으로 친숙하고 사물은 낯선 것이 되면서 '폐쇄성'을 가지고 '은폐'된다. (2) 고흐의 신발 도구와 용도성의 본질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분석하는 "고흐의 신발"은 사물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도구에 대 한 분석이다. 하이데거의 전략은 형이상학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형이상학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물=도구'라는 인식 틀에 대해 도구가 진정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 하면 이 작품에서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가 드러난다고 한다. 고흐의 작품 '신발'에 대한 하이데 거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구멍으로부터 노동의 발걸음의 고통이 응고하 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서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 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성함이 깃들어 있다. 구두 바닥에는 해질 무렵 들길의 고요함이 깃들여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말없는 증여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의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배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 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고뇌를 극복한 소리 없는 기쁨과, 출산의 도래에 대한 환희의 전율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예술작품의 근원 - 4 - 신발 도구 속에서 대지와 농부의 세계가 함께 보인다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이때 재현의 대상인 신 발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신발이 아니고 도구 연관 전체로서 '농부의 세계'를 드러내준다고 한다. 세계 를 보는 농부의 시선과 삶의 지향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것은 농부가 신발을 신는 일상 행위에서 도 나타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때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신뢰성'에 있다. 누군가 신발을 신었는데 그야말로 아주 편해서 신발이 신발 역할을 잘 할 때가 가장 신발다운 때이고 이렇게 되면 신 발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발을 신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 고 신발이 사라져버리는 그 지점에서 '신뢰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망치도 더 이상 망치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망치가 가장 망치다울 때이다. 회화작품 을 그리는 도구도 마찬가지인데 하이데거는 도구를 하나의 관찰대상으로 삼게 되면 도구답지 않게 된 다고 한다. 그 때는 ①도구가 고장 났을 때, ②도구를 과학적 관찰대상으로 삼을 때이다. 하이데거의 말로 이어나가보면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1차적으로 신뢰성에 있고 신뢰성의 특징은 평소에 우 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작품 속에서 이 신뢰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다. 바로 예술작 품은 '존재자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순간적으로 열어 보여준다. 고흐의 그림에서 신발은 일상 적으로 보았던 곳과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즉 작품 안에서 작품 존재로 있게 되는데 이때 우리 가 평소에는 인식할 수 없던 용도성의 본질인 신뢰성을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한 것이다. 본질 을 은폐하려는 사물의 성향을 풀어헤쳐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고 예술작품 속에서 그 본질의 진리가 생성된다고 본 것이다. (3) 작품과 진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일으키는 것"이고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 와 대지가 투쟁하는 것을 격돌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 자리에 촉매처럼 위치해 있다. '투쟁'이란 세계와 대지를 긴밀하게 공속(共屬)시키는 친밀한 통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란 고흐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농부의 세계처럼 삶이 결정되는 순간 그 자리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곳이다. '대지'는 말하자면 인간이 체류하는 고향과 같은 거처로서 하이데거는 대지를 질료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른바 '스스로 그러한(自然)' 질료적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사물 고유의 성 향이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대지의 성격, 질료를 사 라지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각한다. 고흐의 회화작품에서 '농부의 세계'와 '대지'는 '개방'되면 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세계가 대지 위에 근거하는 것임을 드러내 보인다. 작품 안에서 농부의 세계와 농부가 딛고 살아가는 땅-대지가 신발 안에서 투쟁하게 만드는 것이 고 흐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 결과 드러난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생겨나 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술가의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예술가는 단지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를 서 로 격돌하게 만들 뿐이고 그것의 결과가 진리의 생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의 내밀한 통일과 투쟁의 격돌 속에서 진리가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4) 진리와 예술 하이데거는 보이는 대상 A 자체가 참으로 드러나야지만 보는 주체 B도 A를 참으로 알 수 있다고 했 다. 개념화해서 말하면, 참된 인식은 이성적인 표상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사물 자체가 스스로 발산하 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물의 '개방력'이다. 사물이 그 자체로 드러나 있어야 예술작품에서도 드러난다는 것. 사물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작품 안에서 '사물의 세계'와 '사물이 속 하는 대지'가 충돌한 결과가 '참으로 그렇게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사물 자체가 '개방력'을 가지고 있고 이 개방성이 열릴 때 우리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 내적인 통일 속에서 작품으로 확립되어 있을 때 감상자는 "그것이 없 지 않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선다. 즉 존재자의 개방성이라는 적막한 충격 앞에 세워지게 된다. 그렇게 - 5 - 되면서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던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고흐의 신발 그림을 봤을 때 감상자 가 받는 충격을 하이데거적 언어로 말하면 존재자가 참으로 개방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작품 안 의 작품존재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는 존재자의 '개시성(開示性)'이야 말로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도 록 하는 최종 근거가 된다. 현재 우리는 인간을 인적 자원, 자연을 자연 자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유익하고 유용 한 것은 '있는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에게 유용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평소에는 매우 친숙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대상 사물이 작품 안으로 옮겨가게 되면 친숙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게 된다. 하이데거의 경우 이러한 충격을 '자각'하게 되면 내 앞에 있는 그 무엇을 나에게 유용한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된다. 대상에 대한 자각 이전과 이후의 태도가 전혀 다르게 된다. 확대해보면 내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전혀 달라 진다. 다시 말하면 곧 통상적인 행위와 평가에 대해 조심스러워지고, 자신의 지식과 시야를 함부로 적 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철학과 대결한 이유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이다. 3.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예술 이해: 마이어 사피로의 고흐 구두 그림 해석 존재 사유의 길로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의 한계(반현상학적 태도) 1. 예술에 대한 또 다른 질식을 가져온다. 2. 현대의 예술 흐름에 부응하지 못한다. 현대 예술에서 보여지고 있는 근대 미학이후의 거대 담론 (통일적 이론화)을 거부하는 추세에 부응하지 못한다. 마이어 사피로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속였다. 그는 구두 그림을 보 면서 농부와 토양에 얽힌 일련의 감동을 간직해 왔다. 하지만 농부와 토양은 그 그림 자체에는 존재하 지 않으며, 오히려 원초적이고 소박한 것에 대한 강한 열정을 지닌 하이데거 자신의 사회적 관점에 바 탕을 두고 있다. 심지어 그는 모든 것을 상상했고, 그것을 그 그림 속에 투사했다.” 하이데거의 해석은 예술 창작의 물질성을 질식시키고 존재 신비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과도한 지성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사피로는 “하이데거의 오류는 신발 그림에 대한 주의 깊고 진실된 관심이 아닌 자신의 투사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비판한다. 사피로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형이상학이라는 이론적 개념에 의존하는 예술의 형이상학 화를 추구하고 있다.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 자체에 더 주목해야 한다. 고흐의 구두 그림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작품 자체와 화가 고흐이다. 하이데거의 사유에서는 작품 에 대하여 논하고 있을 경우에도, 단지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만 수행하고 있으며(사물의 본질, 대지와 세계의 투쟁 등), 화가에 대한 논의는 아예 빠져있다. 사피로의 고흐 구두 그림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고흐의 구두 그림은 농부의 구두가 아니라, 고흐 자신의 구두이다. 그것은 그의 삶의 애환과 경험이 녹아 있는 자신의 삶의 부분이다. 구두는 자신의 몸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자기 인식을 불러오는 것 이다. 구두는 우리가 걸치고 땅을 밟는 의복의 일부이며, 움직임과 피로, 압박, 무거움이라는 부담이 깃든 부분이다. 구두 그림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촉매제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구두 그림은 단순한 사물이 아닌, 자신의 삶이 녹아있는 일종의 ‘자화상’이다. 언어적 용법에서도 ‘누군가의 신발을 신는다(standing in one’s shoes)’는 것은 그와 같은 곤경에 처하거나, 그의 삶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고흐의 구두는 자신의 삶이 체현된 자신의 일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삶의 부분에 대 한 표현인 것이다. 고흐의 구두와 관련된 고갱의 다음의 이야기는 이러한 주장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1888년 아를르에서 수개월 간 고흐와 함께 생활했던 고갱은 친구의 신발 그림 뒤에 숨겨진 개인 사를 감지했다. 그는 고흐의 신발과 깊게 연관된 이야기를 회고한 적이 있다. - 6 - 작업실에는 커다란 징이 박힌 신발이 있었는데, 완전히 낡고 진흙이 뒤범벅된 신발이었습니다. 그 는 그것을 놀라운 정물화로 만들었습니다. 이 오래된 유물에 대해 사연이 있다고 왜 의심했는지 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굉장히 미안한 말이지만, 보통 사람들 같으면 버 렸을 것 같은 넝마 같은 신발을 보관하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목사셨고 그의 바람에 따라 나는 신학을 공부했네, 신임 목사가 된 나는 어느 화창한 아침, 가족에게 말하지 않고 벨기에로 떠났고 거기 공장에서 내가 배운 대 로가 아닌 내가 이해한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다네. 이 신발들은 보시다시피 그 여행의 고단함을 꿋꿋하게 견뎌주었네.” 고흐의 구두에 대한 고갱의 이야기는 그 신발이 고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삶의 한 부분임을 알 려준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삶의 시작에서 이어지는 삶의 고단함, 삶의 무게와 부담을 지탱해 온 자 신의 삶이 녹아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삶이 작품으로 표현된 것이다. - 7 -